"고압 전선에 우리 주민 다 죽는다!"
지난달 21일 오전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앞. 경기 안성시 삼죽면에서 올라온 50~70대 주민 200여명이 '송전선 건설 반대' 피켓을 들고 힘껏 구호를 외쳤다. 한전이 추진중인 안성 서운면-삼죽면 송전선로 건설 계획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한 주민은 "송전탑이 41개나 들어서면 마을 자체가 망가질 판인데, 한전은 주민 공청회조차 한 번 열지 않고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며 목청을 높였다.
이 같은 시위는 최근 들어 한전 본사 앞이나 송전탑이 건설되는 지역에서 익숙한 풍경이 됐다. 매년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송ㆍ변전소를 늘리고 있는 한전과 이에 반발하는 지역 주민들 간 대립이 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31일 한전에 따르면 현재 정부의 인가를 받아 전국에서 추진중인 송전선로 사업은 총 41개. 모두 합치면 총길이가 645㎞, 송전탑 건설이 1,600개에 이르는 대규모 국책 사업이지만, 사업이 추진되는 곳마다 반대 집회와 소송 등이 이어지며 주민들과의 마찰이 극심하다.
10여개 사업은 주민의 집단 반발로 공사가 지연되고 있고, 일부 사업은 주민이 토지를 팔지 않고 버텨 아예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경남 밀양을 지나는 북경남 송전선로 사업의 경우 180여건의 민원이 제기된 데 이어 최근 밀양 주민 1,0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궐기대회가 연일 열려 지역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강원 인제군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한 법적 대응에 나섰고 충남 아산시 인주면, 전남 진도 주민 등도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송전선로 계획 백지화를 위한 투쟁에 돌입했다. 일부 지역에선 한전 직원과 주민들간 폭력 사태도 빚어졌다.
해묵은 과제인 송ㆍ변전소 건설 갈등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은 전력 공급을 위한 시설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지역 주민들의 환경 욕구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전은 2015년까지 전력수요가 1998년의 두 배 가까운 7,000만kW로 늘 것에 대비해 부산 기장군에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1ㆍ2호기 등을 건설 중인데, 이 곳에서 생산된 전기 공급을 위해 송ㆍ변전 시설도 확충하고 있다. 한전 관계자는 "국가적인 전력 공급 사업에 차질을 빚지 않게 하려면 현재 계획과 노선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십 개의 철탑과 거미줄 같은 송전선로가 들어서면 관광자원 파괴, 땅값 하락 등을 유발할 것이란 우려로 주민들의 반발 강도는 더욱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고압 송전선로로 인한 전자파 피해 의혹도 크다. 주민들은 송전선이 땅 속으로 지나가게 하는 지중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한전측은 공사비가 7~14배 더 들어 힘들다는 입장이다.
한전이 주민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도 없이 사업을 진행해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원개발 촉진법에 따라 한전이 송ㆍ변전 시설을 건설할 경우 지식경제부의 허가만 얻으면 개인 토지를 강제 수용할 수도 있다. 녹색연합 서재철 국장은 "일본은 국방시설의 경우도 마을 단위에서부터 설득작업을 벌인다"며 "주민들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기보다 설득과 합의를 먼저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강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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