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인 1988년 9월 1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헌법의 이념을 수호한다'는 기치 아래 헌법재판소가 출범했다. 6월 항쟁의 결과물이긴 했지만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란 점에서 헌재를 바라보는 초기의 시선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한층 더 신장시키는 결정들이 속속 이어지면서 헌재는 사문화하다시피 했던 헌법을 국민생활 속에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1일로 만 20년이 되는 헌재에 대해서도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그간 위상은 높아졌지만 한편으로 판ㆍ검사 출신 엘리트 법조인이 재판관직을 독식하기 시작하면서 경직돼 갔고, 정치적 사건에 휘둘리며 길을 잃는 경우도 늘어갔다. '성년 헌재'에게는 정치 과잉의 지양, 소수자 보호에 눈감지 않는 판결, 재판관 인적 다양성 확보라는 숙제가 주어져 있다.
■ 왕성한 활동
헌재 이전에도 헌법재판 기능기구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과 독립기구인 헌법위원회 등에서 내린 위헌 결정은 총 10개가 되지 않았다. 헌재의 왕성한 활동은 그래서 더 주목받았다.
헌재는 지난 7월말까지 1만5,663건의 사건을 처리했고, 이중 782건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거나 위헌성을 지적(한정위헌, 헌법불합치 등)해 개선을 명령했다.
헌재가 없었더라면 여전히 동성동본의 남녀는 결혼을 할 수 없고, 여성 취업준비생은 공무원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도 군가산점 제도에 밀려 불합격 처분을 받고 있었을 지 모른다.
재혼을 하고도 전 남편의 성과 본을 써야 하는 자녀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는 가정도 여전했을 것이며, 사법시험 1차에 4번 떨어진 고시생은 4년 동안 사시에 응시할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것이다. 헌재는 20년 동안 기본권이 침해 당했다고 느꼈을 때 주저 없이 두드릴 수 있는 문이 되어 줬던 셈이다.
하지만 헌재의 판결로 인해 혼란에 휩싸인 사안들도 많았다. 2000년 헌재는 과외금지 규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는데, 그때부터 사교육 폭풍은 한국을 집어삼켰다. 이 판결은 당시 소수 의견을 냈던 재판관만 유일하게 강남 지역에 살지 않았다는 점까지 거론되면서 계속 논란거리로 남았다.
2006년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인정한 조항에 대해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위헌 결정한 사안도, 소수자의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헌재는 양심적 병역거부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정부가 오히려'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를 앞장서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헌재가 국민의 권리 문제를 지적하고, 정부가 이에 맞춰 법을 개정하는 것이 헌재의 존재 이유라면 '대체복무'의 사례 등에서는 헌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다.
■ 풀어야 할 과제
헌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헌재에는 검찰 못지 않게 정치적 사건이 들이닥쳤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때는 헌재가 정국의 중심에 서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심판도 정국에 소용돌이를 불러왔다. 헌재가 헌법의 이념을 수호하다 보니 국정 난맥상을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점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헌재 스스로 정치적 사건에 너무 깊숙하게 발을 담근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임지봉 서강대 법대 교수는 "헌재는 정치적 사건은 소극적으로, 소수자 권리와 관련된 사건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헌재 3기부터는 그 같은 기준이 뒤바뀌었다"고 지적했다.
탄핵사건은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의 과정상 문제점을 들어 '각하'했어야 했고, 행정수도 이전문제도 정치적으로 풀도록 기각했어야 하는데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관습헌법'까지 들고나와 무리한 판결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임 교수는 "낙태권 인정과 백인ㆍ흑인학교 분리 폐지 같은 미국 사회의 발전은 정부가 아닌, 연방대법원의 판결에서부터 시작됐다"며 "다수의 표를 의식한 행정부나 입법부가 하지 못하는 소수자 보호를 사법부가 나서서 해야 하는데, 헌재는 3기부터 그 같은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재판관 구성의 다양성 확보도 헌재가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다. 헌재 1기가 척박한 토양에서도 헌재 발전의 토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시각을 가진 재야 출신 법조인들이 주축이 됐기 때문이다.
변호사 경력 22년(66년 개업)의 조규광 초대 헌재 소장을 비롯, 변호사 경력 19년의 최광률 재판관(69년 개업), 역시 19년간 변호사와 국회의원을 거친 한병채 재판관, 변호사 경력 10년의 변정수 재판관 등이다. 9명 재판관 중 법원이나 검찰에서 바로 헌재로 옮겨온 사람은 2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헌재 재판관들은 '재야 경험이 없는 엘리트 판ㆍ검사 출신 50대 남성'으로 굳어져왔다. 최?들어서는 대법관 구성보다 더 경직됐다는 목소리가 높다.
헌재 재판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법관, 검사를 하다가 바로 재판관으로 온 사람들은 시각이 한정될 수밖에 있다"며 "학자, 재야 경력이 많은 변호사, 여성 등 다양성을 확보하지 않고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세계 헌법재판소장 한자리에
헌법재판소는 창립 20주년을 맞아 1∼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세기 권력분립과 헌법재판'이라는 주제로 세계헌법재판소장 회의를 개최한다.
유타 림바흐 독일 전 헌재소장, 니컬러스 필립스 영국 수석재판관, 마리아 에밀리아 스페인 헌재소장, 이소 이마이 일본 최고재판소 재판관 등 각국 헌법재판소장이나 대법관 등 헌법재판 고위 관계자 150여명이 참석한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스페인, 이탈리아, 몽골 등 30개국과 베니스위원회, 유럽헌법재판소회의 등 6개 지역 헌법재판기관 협의체가 포함됐다.
특히 독일의 첫 여성 헌재소장이었던 림바흐씨를 비롯,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스페인, 키르기스탄, 크로아티아, 필리핀, 리투아니아, 불가리아 등의 헌재소장이나 대법관 등이 모두 여성이어서 세계 법조계의 우먼 파워를 대변해 주고 있다.
■ 하철용 헌재 사무처장 "국내 사법시스템 중 수출 경쟁력 유일 자신"
20돌을 맞은 헌법재판소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헌법 재판 시스템을 확고히 다진 국가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는 평가 때문이다.
하철용(59)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장관급)은 31일 본보와 가진 헌재 2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국내 사법시스템 중에 해외로 바로 수출할 수 있는 것은 헌법재판소가 유일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헌재 재판 시스템이 발전했다"며 "앞으로도 헌재의 주어진 사명과 책무에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하 처장은 헌재가 직면한 과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어느 국가나 정부-국회-법원-헌재의 권한 관계가 이슈가 되고 있다"며 "다른 국가기관을 존중하고, (정치적 사건 등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전반적인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헌재 재판관 구성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20년 동안 헌재가 이룬 내부 발전에 대해 하 처장은 "판사, 검사 출신들이 재판관을 보좌하는 헌법연구관이 되기 위해 지원하는 등 헌법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가고 있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로 언급했다.
1988년 헌재 출범 당시 12명에 불과했던 헌법연구관은 현재 56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헌법의 해석과 적용을 놓고 날선 토론을 벌이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보고서를 작성, 재판관들이 정확한 선고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토양이 되고 있다.
이강국 헌재소장으로 4기 재판부가 꾸려진 이후 연구관 시스템에서 융통성이 더 가미됐다.
이전까지는 재판관 1명을 4명의 전속연구관이 보좌했지만, 4기 재판부부터는 재판관 1명당 1명의 전속연구관만 두고 나머지 연구관들은 3개 부 체제의 공동시스템으로 전환했다. 공동연구를 통해 토론의 시야를 넓혀, 혹시 있을 지 모르는 논리의 오류를 최대한 막기 위해서다.
하 처장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고 논리 정연한 결론(선고)를 도출하고, 국민의 신뢰를 80% 이상으로 높이자는 것이 이강국 헌재소장님이 제시하고 구성원들이 따르고 있는 목표"라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사진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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