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럽다'는 '정분이 두텁지 않아 조심스럽다', '수줍고 부끄럽다'는 뜻이다. 그 명사형 '스스럼'에 부재(不在)를 나타내는 접미사 '-없다'를 덧붙여 '스스럼없다'의 형태로 많이 쓴다. '스스럼없는 사이'는 서로 서먹하지 않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다. 흔히 다정한 사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고희(古稀)를 넘긴 어르신 앞에서 젊은이가 스스러워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스스럼의 정도는 개인들의 성격 차이에 많이 달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나 나이든 스승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람도 있다. 아주 외향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다. 그 외향성이 절제를 잃으면, 결례나 불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리라.
스스럼은 자신과 다른 성(性)을 대할 때 더 커지는 것 같다. 유년기부터 10대 말까진, 나도 남자보다 여자를 대하기가 더 스스러웠다. 그런데 나이 스물을 넘기면서, 어찌된 일인지 여자를 더 스스럼없이 대하게 되었다. 내 깊은 곳의 아니마(anima)가 약관에 이르러 급격한 항진을 겪었나 보다.
가슴 두근거림, 얼굴 붉어짐
남녀 사이의 스스럼은(동성애자라면 같은 성끼리의 스스럼도) 연애의 시작이다. 한눈에 반했든 호감이 쌓여 애정으로 변했든, 아직 고백하지 못한 사랑의 대상 앞에서 우리는 스스럽다. 여느 여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남자도, 제가 (몰래) 사랑하게 된 여자 앞에선 스스럽다.
여느 남자들을 대하는 데 스스럼없는 여자도, 제가 (몰래) 사랑하게 된 남자 앞에선 스스럽다. 그 스스럼은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얼굴이 붉어진다거나 말을 더듬거리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이 받아들여진 뒤에야, 그 스스럼은 점차 줄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진다. 가슴 두근거림도, 얼굴 붉어짐도, 어눌함도 차차 잦아들어 이윽고 없어진다. 그것은 열정이 탈바꿈을 겪는다는 뜻이다. 열정은 정으로 도타워진다. 스스럼은 정다움으로 바뀐다.
처음 본 남녀가 그 날로 잠자리를 같이하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양풍(洋風)까지 대범히 받아들이는 요즘 일부 젊은이들에겐, 이런 스스럼의 생리학이 너무 구닥다리로 비칠 것이다. 물론 섹스는 스스럼을 없애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첫 만남에서 섹스까지의 거리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이 나는 불편하다.
스스럼이 정다움으로 무르익을 숙성기간을 적어도 몇 개월은 거친 뒤에야, 그 정다움이 겨워져, 혹은 격해져, 살갗을 부비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순정의 목마름이 생겨난 순간에야, 섹스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엽기적인 <덱스터> 에서 허황한 <사라 코너 연대기> 를 거쳐 감상적인 <그레이 아나토미> 에 이르기까지 소위 '미드'라면 환장을 하는 내가 역겨워하는 미국 드라마가 있으니, 그게 <섹스 앤 더 시티> 다. 이 드라마에서 호모 사피엔스(특히 여성)는 그저 '성적 인간'(호모 섹수알리스?)일 뿐인데, 나는 그것이 실제의 인간을 크게 비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가 중산층의 페미니즘을 담고 있다고? 글쎄, 그 말은 <캐시미어 마피아> 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캐시미어> 섹스> 그레이> 사라> 덱스터>
사랑이라는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섹스를 나는 스스러워한다. 사실은 혐오한다. 아니, 스스럼이나 혐오감을 떠나서, 그런 '인스턴트 섹스'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강간이나 성매매의 상황이 아니라면, 어떻게 처음 본 여자(또는 남자)와 잠을 잘 수 있을까? 첫눈에 감전된 듯 서로 반해 그 길로 몸을 섞는 것, 그것은 신화 속의 사랑이거나 발정 난 짐승의 놀이다.
나는 섹스를 연애의 시작이라 여기지 않고, 중요한 매듭이라 여긴다. 내가 호모 사피엔스를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 보수주의잔가?
똑같은 상황에서도 남들보다 스스럼을 잘 타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전문 엔터테이너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내겐, MBC 오락 프로그램 <황금어장> 의 '라디오 스타' 코너와 <명랑 히어로> 에 나오는 김국진씨가 그런 스스럼쟁이 같다. 그는 때로 스스러워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하고, 스스럼 때문에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명랑> 황금어장>
스스럼은 연예인에게 결코 유리한 조건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스스럼이 외려 정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연예인들에 견줘 스스럼이 많으므로. 나는 김국진씨의 스스럼 앞에서 내 스스럼을 떠올리고,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럼을 느끼지 않는 듯한 연예인(이나 정치인)을 보면, 그 '프로정신'을 찬탄하기보다, 활달함을 넘어선 그 뻔뻔함을 나무라고 싶다.
개그맨 김국진 모습에 정감 느껴
스스럼은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으로도 드러나지만, 도드라지게는 어눌함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짝사랑의 대상 앞에서, 우리 혀는 자주 꼬이고, 할 말은 혀끝을 맴돌 뿐 발설되지 않는다.
스스럼이 (거의) 없어지는 것은 상대와 너나들이를 하게 됐을 때다. 섹스가 스스럼이 없어졌다는 표시이자 스스럼을 없애는 수단이듯, 너나들이 역시 스스럼이 사라졌다는 증거이자 스스럼을 없애는 방법이기도 하다.
같은 연배 사람들과 스스럼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너나들이를 한다. 한편 그들과 스스럼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부러 너나들이를 하기도 한다. 나이 차가 나는 사람들끼리도, 스스럼이 없어지면, 너나들이야 하지 않지만 흔히 반말을 주고받는다.
내 세대 사람들이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같은 과나 동아리의 동급생들끼리도 남녀 사이엔 너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성도 빼놓지 않고 이름 석 자를 다 부른 뒤에, 꼭 '씨'를 붙였다. 성을 빼고 이름만 부른 채 뒤에 '씨'를 부르면, 왠지 천하게 들렸다.
나는 그 감각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내 세대 사람들 가운데도 내 이런 감각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살아온 길이 달라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워낙 중뿔나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연기인 유호정-이재룡 부부를 알게 돼 혹시라도 그들과 스스럼이 없어진다면, 나는 그들을 '호정아!' '재룡아!'라고 부를 것이다. 알게 됐다 하더라도 스스럼을 느끼는 사이라면 나는 그들을 '유호정씨!', '이재룡씨!'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호정씨!' '재룡씨!'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겐 그것이 큰 결례처럼 느껴진다. (굳이 털어놓자면 '화류계' 분위기? 나는 지금 '화류계'를 깔보고 있지 않다. 그저 내 취향에 안 맞는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호정아!' '재룡아!' 운운함으로써 우리는 다시 너나들이로 돌아왔다.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 나는 동아리의 불과 2년 후배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너나들이 하는 걸 충격과 부러움에 휘둘리며 지켜보았다.
그 뒤로, 스물 넘은 대학 동급생들이 다른 성(性)의 급우와 너나들이 하는 게 유행이(더 나아가 규범이) 된 것 같다. 대학에 다니는 내 아이들도 제 이성 급우와 너나들이를 한다. 동급생끼리는 아예 처음 볼 때부터 너나들이를 하는 듯하다.
사회 친구와 너나들이 하기엔…
나는 청춘기의 스스럼을 만회하기 위해, 서른 넘어서 사귄 '사회친구'들과 너나들이를 하기 시작했다. 여자하고든, 남자하고든. 사회에 나와서 사귄 친구들 가운덴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으므로, 내가 '아무개야'라고 부르는 '사회친구'나 '사회후배' 가운덴 여자가 더 많다.
나는 치사하게도, 나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위인 '사회친구'와는 어떻게 해서든 너나들이를 하려 하면서, 나보다 한 살이라도 아래인 친구에겐 좀처럼 너나들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 쪽에서 나를 손위로 대접해주지 않으면, 나도 그냥 '김형!' '박선생님!' 하는 식으로 거리를 둔다. 계속 스스러운 사이로 지내자는 것이다. 나보다 나이가 아래이면서(고작 한 살 차이다!) 나와 너나들이를 하는 '사회친구'는 소설가 조선희씨밖에 없다.
아주 드문 일이기는 하나,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말을 트고 너나들이를 하게 된 친구도 있다. 문화비평가 이재현씨와 변호사 차병직씨가 그렇다. 너나들이가 섹스 못지않은 스스럼 치료제라면, 내가 이재현씨나 차병직씨와 한 짓은 처음 만난 이성(또는 동성)과 그 날로 섹스를 한 것만큼이나 외설스럽다.
앞으론 그런 일이 절대 없으리라. 처음 만나자마자 너나들이를 하는 일만이 아니라, 이젠 새로 사귀게 될지도 모를 동년배 친구와 시간을 들여서 너나들이 관계로 나아가는 일도 없으리라.
특히 여자 친구와는. 이미 너나들이를 하고 있는 여자 친구들이야 할 수 없지만, 쉰 너머 알게 된 여자와 너나들이를 하는 것은 내 '리버럴리즘'도 감당하지 못할 '야만' 같다.
사실, 앞으로 친구를 새로 사귀게 될 일이 있기나 할는지. 아무튼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동년배 지인들에겐, 여자든 남자든, 스스럼을 견지할 생각이다. '강형!' '황선생님!' 하면서. 스스럼은 연애감정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나이든 육신의 기품을 지켜주는 장신구이므로.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일러스트 김경진기자 jin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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