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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대표 기업의 성공DNA] <5> 신화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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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대표 기업의 성공DNA] <5> 신화는 계속된다

입력
2008.09.0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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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임원과 건설 요원들이 모였다. 막 출선구(쇳물이 나오는 통로) 뚫기가 끝난 참이었다. 어찌 될 것인가. 깊은 바닷속인 듯 깊고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것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설치된 최고의 대형 고로(용광로)였다. 과연 쇳물이 터져 나올 것인가. '펑!' 모두가 숨죽인 순간, 쇳물이 터졌다" (조정래 인물 이야기 <박태준> 편에서)

모래바람만 불던 영일만 허허벌판 위에 제철소 첫 삽을 뜬지 40년. 포스코(옛 포항제철)는 이제 연산 3,300만톤의 철강 생산능력을 지닌 세계 3~4위권의 글로벌 철강기업으로 도약했다. 누구도 믿기 힘든 기적의 역사가 현실화 한 것이다.

포스코가 걸어온 길은 '신화의 역사'다. 시작부터 난관에 맞닥뜨린 가시밭길이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원대한 창업정신으로 의욕은 앞섰지만, 첫 출발은 위태롭기까지 했다.

■ 불가능을 가능으로

"한국의 제철공장은 엄청난 외환비용에 비춰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건설을 연기하고, 노동 및 기술 집약적인 기계공업 개발을 우선해야 한다"(1968년 11월 세계은행)

"한국의 제철사업은 중단기 외채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외화의 획득분보다 상환부담이 더 커서 국내 자본 축적을 해칠 수 있다"(1969년 4월 레이몬드 굿맨 국제경제협의체 회장)

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제철보국의 막중한 임무를 떠안은 박태준 사장. 그의 앞길은 온통 장애물이었다. 대한민국 산업을 든든하게 받쳐 줄 제철소 건설에 '긍정적 신호'를 보내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당시 일본의 자금지원으로 어렵사리 제철소 건설의 첫 발을 내딛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언론들은 "외자부담이 큰데 왜 제철소를 건설하나. 그냥 수입강재를 쓰는 게 국민경제에 낫다"며 반대 목소리를 키웠다.

당시 박 대통령은 공사현장을 둘러보면서 "남의 집 다 헐어 놓고 과연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며 근심했다. 하지만 박 사장은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해 동해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을 각오를 하자"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당시 직원들의 성공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로 '빨간 헬멧 제도'가 있었다. 제품에 불량이 나거나 예정된 시간에 작업을 못 맞추면 붉은 페인트를 칠한 빨간 헬멧을 쓰고 작업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빠른 성과 달성을 독려하는 동시에 책임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이런 강한 노력으로 통상 건설에 4~5년 걸리는 제철소가 2~3년 만에 쇳물을 쏟아냈다. 건설 기간이 단축되면서 1기 고로 건설의 투자비도 톤당 500달러에서 절반 수준인 260달러로 줄었다. 이런 신화는 광양제철소 건설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빨리 빨리'로만 승부한 것만은 아니었다. 잘못된 것은 과감히 고쳤다. 1977년 3기 설비 공사가 지연되는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공사가 무려 80%나 진척된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이 부실로 판명이 나자 폭파한 일은 아직도 이 업계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 신화는 지속된다

포스코의 발전은 한국 근대화와 맥을 같이한다. 1970년대 우리나라 생존전략은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진흥이었다. 이 전략의 성공 여부는 결국 철강산업 발전에 달려있었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은 현재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조선, 가전, 자동차 등의 핵심 산업에 필수 요소다.

좋은 철강제품이 있기에 세계 1위의 조선강국이 가능했고, 아름다운 외관을 지닌 철판이 나왔기에 멋진 가전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세계 5위의 자동차 강국도 결국 든든한 포스코가 큰 힘이 됐다.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의 국가 체질 개선이 철로 이뤄진 것이다.

국내 산업계의 '밀알'이었던 포스코가 이제 세계를 향해 달리고 있다. 미국 철강 전문지(WSD)는 전 세계 철강사 경쟁력 평가에서 포스코를 수익성, 재무구조, 기술개발 면에서 모두 1~2위로 평가했다. 포스코가 독자 개발한 최첨단 쇳물 생산 공법인 '파이넥스' 기술은 철강업계에서 혁신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경영혁신과 사회공헌, 상생경영, 윤리실천 등 지속 가능 경영을 통한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은 눈부시다. "한번 추진한 혁신활동은 적어도 10년 정도는 추진해 봐야 성과를 알 수 있다. 회사이윤과 기업윤리가 상충되면 주저 없이 기업윤리를 택하라." 주주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 연임한 현 경영진의 신념이다.

포스코는 이제 새로운 성공신화를 쓰고 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던 포스코는 '또 다른 유'를 창조하기 위해 뛰고 있다. 이를 위해 대우조선 인수전에도 뛰어들었다. 철강-조선-플랜트-에너지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성공 신화를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 국내 첫 제강 명장 전상호씨 "고된 땀방울 바친 직원들에게 박수를"

"포스코가 세계 최고기업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저 눈코 뜰새 없이 일한 기억밖에 없는 것 같은데…."

포스코 신화 창조에는 수많은 '무명 용사'들이 숨어 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첫 쇳물을 쏟아냈던 1973년 입사한 전상호(61) 명장(名匠)도 그 중 한 명이다. 지금은 35년 간의 포스코 생활을 마감하고, 자회사인 포스렉 이사로 일하고 있는 전 이사.

그는 처음 포스코의 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자신의 인생과 회사가 이렇게 바꿀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월남에서 근무하던 둘째 형이 2년간만 등록금을 지원해 준다고 해 인하공전에 입학했습니다. 4년제로 편입학 하려 했지만 강화도 빈농의 아들이라 그럴 형편이 안됐지요."

제대한 뒤인 1973년 2월, 서울의 한 상가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던 전 이사의 눈에 포스코 입사공고가 들어왔다. 당시 상가에서는 월급 1만원을 받았는데 포스코에선 2만4,000원을 줬다. 쌀 한 가마니가 4,000원이었으니 적지 않는 수준이었다.

대우는 좋았지만 회사 생활은 고됐다. 오전 8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5시간씩 일했다. 밤에는 집합교육이 이어졌다. "일요일 쉴 수 있었는데요. 회사는 '정신상태가 해이해진다'며 매주 월요일에 시험을 봤습니다. 여유나 투정을 부릴 틈이 없었던 거죠."

당시에 뿔도 났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 교육을 시킨 회사가 너무나 고맙다. 제철기술을 제대로 알고 있던 기술자가 없었고, 교재도 찾기 힘든 시절이었다. 기껏해야 일본어로 된 제철 관련 서적이 전부였다.

공부에 한이 맺혔던 탓일까. 전 이사는 당시 쇳물 관련 책을 빠짐 없이 읽었다. 1984년 전남 광양제철소를 짓는 선발 요원으로 뽑혔고, 그 해 광양 제강설비 공급사인 오스트리아로 연수를 가기도 했다.

"지금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집안의 도움도 컸습니다. 야간에 일을 하고 집에 오면 낮에 잠을 자야 했는데 집 사람은 방해가 될까 봐 아이들을 업고 밖에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포스코 신화는 가정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전 명장은 포스코처럼 성장했다. 포스코 회장 표창 1회, 장관 표창 2회, 국무총리 표창 1회, 대통령 표창 2회…. 1995년에는 노동부가 선정하는 제강분야 최초의 명장으로 뽑혔다. 97년에는 이공계 대졸자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던 기술사 자격증을 땄고, 2004년에는 석사, 2007년에는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포스코가 지금과 같은 최고기업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포스코인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지난 40년간의 성공신화를 이제 후배들이 이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포스코 선후배의 끈끈한 정이 미래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박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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