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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소멸' 청산하고픈 자기 뿌리 기록하는 작가의 '反자서전'적 3일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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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소멸' 청산하고픈 자기 뿌리 기록하는 작가의 '反자서전'적 3일 여정

입력
2008.09.0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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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ㆍ류은희 조현천 옮김/현암사 발행ㆍ508쪽ㆍ1만4,800원

현대 독일어권 문학의 거장으로 기억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가 1986년 발표한 마지막 소설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옛 거장들> 과 함께 그의 3대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소설은 작가이자 가정교사인 '나'가 교통사고로 죽은 부모와 형의 장례를 치르러 귀향한 3일간의 이야기다.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볼프스엑은 매일밤 그의 악몽에 등장하는 곳. 사흘 동안 주인공은 과거에 대한 회상, 주변 세계와 인물을 관찰하다 떠오른 단상들을 쏟아낸다. 로마의 거처로 돌아온 그는 <소멸> 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쓴다. 그에겐 청산하고픈 자기 뿌리를 기록하는 반(反)자서전이다. 사건의 철저한 배제, 허구와 실제의 혼융 등 베른하르트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볼프스엑에서 보낸 주인공의 어린 시절은 나치즘이 득세하던 시대. 그를 사로잡은 고향 혐오의 중심엔 정신과 문화를 경멸했던 어머니가 자리잡고 있는데, 정신적 삶을 중시하던 가문의 전통을 무너뜨린 어머니의 천박한 성향이 나치즘에 대한 은유임은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다.

부모의 죽음으로 막대한 유산을 얻게 된 그는 어린날 예술적 감성을 맘껏 펼쳤던 '어린이빌라'를 복구하려 하지만, 전후 나치의 은신처로 이용됐던 그곳에 대한 거부감만 커진다. 순수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전 재산을 유대인 종교 단체에 기증한다. 그리고 필생의 과제였던 반자서전을 완성하고 죽는다.

단락 없이 의식 흐름에 따라 길게 이어지는 문장을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극적인 이야기가 없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작품 도처엔 밑줄 그어둘 만한 날카로운 사유의 문장들이 빛난다. 물질주의에 매몰돼 가는 볼프스엑은 20세기 전반 유럽 파시즘 사회를 넘어, 오늘날의 고도 자본주의에 잠재된 문명의 위기를 갈파하는 상징적 장소로 읽힌다. 조국 오스트리아의 보수적 면모에 문학적 저항으로 일관했던 작가의 생애를 기억하는 것도 작품 이해에 도움될 듯싶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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