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학교수 K(49)씨는 지난달 큰 맘 먹고 일본 H사의 배기량 3,500㏄ 차량을 3,900여만원에 구입했다. 디자인도 맘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국산 고급 대형차(4,100만~5,900만원)보다도 싼 가격에 수입차를 탈 수 있다는 점에 결심을 하게 된 것. 실제로 이 모델은 지난달 우리나라에서 818대가 팔려 수입차 중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달 일본 전체 판매량 596대를 훨씬 웃도는 것이다. K씨는 다음달엔 일제 골프채를 살까 고민중이다.
#2.돌이 갓 지난 딸을 키우는 주부 A(35)씨는 아기 기저귀로 일본 G사의 제품을 쓴다. 국산품이 66~72개짜리(중형) 한세트에 1만9,000~2만7,000원인 반면 일본 기저귀는 2만원이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이가 대소변을 보면 기저귀 겉면에 파란 띠가 생겨 구별하기 쉽다. A씨는 “일제는 품질좋고 가격면에서도 국산과 큰 차이가 없거나 더 싼 경우가 많다”며 “예전에는 미제나 영국제 젖꼭지와 유아용 과자, 이유식을 썼던 산모들도 최근에는 일제로 바꾸는 추세”라고 말했다.
일본 제품들이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의 핵심 소재와 부품들을 점령한 데 이어 최근에는 국내 소비자의 안방까지 본격적으로 넘 보기 시작했다. 자동차부터 기저귀까지, 간장부터 담배까지, 속옷과 의류, 청주와 맥주 등 바야흐로 일본 소비재 수입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현재 대일 무역수지 적자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철강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가장 많이 수입된 품목은 반도체가 차지했다.
2007년 대일 총수입액 462억5,000만달러 가운데 11.3%인 63억7,000만달러가 반도체였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철강재가 단연 1위로 상반기 대일 철강재 수입액은 38억달러. 전체 대일 수입액 317억달러의 11.9%를 차지했다. 물량과 함께 수입 단가가 상승한 것도 수지 악화를 심화시킨 요인이다. 지난해 5월 600달러 내외였던 조선용 형강의 일본산 수입 단가는 최근 900달러선을 돌파했다.
화학소재류도 대일 수입액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집적회로(IC) 소재인 포토레지스트의 대일수입은 올 상반기 40%나 늘었다. LCD 패널 소재인 액정도 32.2%나 증가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최근 소비재 수입광풍. 품질뿐 아니라 가격면에서도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실제로 H 할인매장에선 일본산 된장(1㎏)이 6,530원인 데 비해 국산 된장은 3,780~8,900원에 판매되고 있다.
일본산 인터넷 쇼핑몰이나 대형 할인매장에는 일본 유아용품 코너가 주부들 사이에 큰 인기다. 주부 박모(36ㆍ서울 송파구 잠실동)씨는 “일제 유아용 과자나 이유식은 우리나라 제품보다 종류가 다양하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며 “용량 등을 감안하면 가격이 더 비싼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이처럼 산업재는 물론 소비재까지도 일제가 홍수를 이루며 대일 무역 적자폭은 확대 일로에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무역에서 단 한번도 흑자를 내 본 적이 없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대일 적자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 정부'헛다리 짚기'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줄어 들긴커녕 갈수록 늘면서 그 동안 정부는 뭘 하고 있었는지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사실 대일 무역 역조를 개선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199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일본에서 수입되는 제품의 국산화를 통해 대일 무역수지 적자를 줄여 나가자는 게 당시 정부 시책으로 추진됐다. 이에 따라 일부 전자제품들의 국산화가 시도됐다. 그러나 워낙 기술 수준이 뒤떨어져 있던 터라 핵심 부품이나 소재류의 국산화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90년대 이후 부품ㆍ소재 산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면서 정부는 2001년 부품·소재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본격적인 부품ㆍ소재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을 추격하기 위한 실용화 기술 개발을 위해 2000~2006년 모두 2조9,000억원의 연구개발(R&D) 예산이 지원됐다. 또 개발된 기술이 사업화로 연결될 수 있도록 융자자금 및 투자펀드 지원책도 강구됐다. 중소기업진흥 및 산업기간기금을 통해 같은 기간 3,936억원, 신기술 산업육성자금을 통해 2005~2006년 8,756억원이 지원됐다.
정부는 또 2005년1월 부품ㆍ소재 발전전략 보고대회를 가진 뒤 지난해 7월엔 소재산업 발전 비전 및 전략 수립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헛다리 짚기나 마弼≠熾눼募?지적을 피하기 힘들게 됐다. 현재 대일 무역수지 적자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철강재의 경우 극심한 공급난이 대일 수입의 근본 원인이다.
업체의 막대한 설비 투자가 이뤄져야 대일 무역수지 적자를 다소 줄일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업체들이 뒤 늦게 설비 투자에 나서고 있지만 생산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4,5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최근에는 고철(철스크랩)까지 일본에서 수입해서 써야 할 정도로 철강업계의 공급난은 심각하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업계와 정부가 뭘 하고 있었는지 반문하게 되는 대목이다. 지경부 관계자는 "부품의 경우엔 그 동안의 노력에 힘입어 대일 수입 의존도가 2004년 27.5%에서 올 상반기 23.4%까지 감소했다"며 "내년에는 세계 경기 둔화에 따라 원자재 가격이 안정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수입 단가 하락으로 대일 수지도 다소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 "日에 없는 독창적 제품 수출 늘리는 게 해법"
'우린 일본과의 장사에서 항상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걸까.'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40년 가까이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지속되며 정말 대책은 없는 것인 지가 관심사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객관적인 경쟁력을 놓고 볼 때 앞으로도 대일 적자는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먼저 대일 수출을 늘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한목소리다. 수입을 줄일 수 없다면 수출을 확대, 적자폭을 줄이자는 얘기다. 실제로 품목별 우리의 대일 수출 실적은 부끄러울 정도다. 1~7월 우리나라의 대일 자동차 수출은 161대에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일본에서 수입된 차량은 무려 110배가 넘는 1만8,007대에 달했다. 금액으로 보면 49억달러 수입에 270만달러 수출로 더욱 초라한 성적표가 된다. 신승관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팀장은 "대일 수입 증가는 우리나라의 수출 구조상 불가피한 면이 많은 만큼 대일 유망수출상품을 발굴하고 일본시장 진출을 지원해야 한다"며 "업체들도 적극적인 대일 시장 공략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기적으로는 국내 소재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진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제품 개발 초기부터 대기업과 소재 부문 중소기업이 함께 상생 협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승부는 창의성에 달려 있다. 일본에는 없는 창의적 기술과 제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 이지평 LG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혁신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일본에선 찾을 수 없는 부가가치를 갖고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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