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참 답답하다. 아니 처참하다. 잊혀졌기 때문이다.
고소영 강부자 인사로 국민의 불쾌감이 들 불처럼 퍼져갈 때도, 미국산 쇠고기 파동 속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휘청거릴 때도, KBS 사장 교체 문제로 지성사회에서 언론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전개될 때도 민주당은 없었다.
민주당이 오로지 보여준 것은 거리와 국회 사이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모습이었다. 스스로는 무척 고뇌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촛불 민심을 받아들여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과 검역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가축전염병예방법을 조금이라도 더 개정하려고 애를 썼다고 자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중은 싸늘했다. 그런 정도는 기대치에 한 참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미 기차는 지나갔는데 역에 서서 기다리는 꼴처럼 보였을 뿐이다.
민주당은 원망할지 모른다. 그 많던 국민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했던, 그래서 이 대통령이 두 차례나 사과까지 했던 그토록 중요한 문제를 벌써 잊었냐고 한탄할지 모른다. 대중민주주의의 한계를 개탄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대중은 정교하지 않다. 변덕도 심하다. 하지만 감각적이다. 개별적으로는 산만하고 무정형의 행동을 보이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이면 의미있는 메시지를 형성하곤 한다. 우매한 듯하지만 명민하고, 아무렇게 움직이는 듯하지만 한 곳을 향해 가는 것이 대중이다.
촛불집회도 그랬다. 쇠고기 협상이 졸속으로 이루어져 국민 불안이 커지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때 대중은 거리로 나섰다. 그 기세는 가히 폭풍처럼 거세 누구도 그 앞에 버틸 수가 없었다. 민주당도 그 파도를 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편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대중은 돌아섰다. 열기는 사라지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남지 않았다. 민주당은 나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거리의 모퉁이에서 서성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대중은 왜 그랬을까. 한미간 추가협상이 만족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이 대통령의 사과가 진정성이 있다고 판단해서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중은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의 오만함에 모든 것을 제치고 나섰지만 언제까지 쇠고기 문제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고 느낀 것이다. 먹고살기가 어려운데 정부를 아예 망가뜨리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감각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래서 이만하면 됐다고 물러선 것이다.
민주당은 그 흐름을 전혀 읽지 못했다. 원래 정치권이, 정당이 대중의 마음을 읽고 한 발 앞서 움직여야 하는데 민주당은 한 발이 아니라 서너 발 뒤쳐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당의 우유부단한 태도가 대중의 관심을 멀어지게 했다. 등원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자기들끼리 논쟁하는 모습은 대중에게는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였다.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를 외치며 고뇌하는 햄릿은 연극에서 멋있게 보일지 모르나 현실정치에서는 답답함 그 자체일 뿐이다. 때로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 대중을 이끌기도 하고 지도부가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승적 선택을 할 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에게 존재감이 생기고 좋아할지, 미워할지의 대상도 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어찌할지를 모르고 헤맬 때 덩달아 방황하는 햄릿 같은 정당을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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