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역사가 없다. 아니 단군 할아버지가 백두산에 도읍한 이래 오천년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조선에 역사가 없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정말 그럴까? 우리는 우리 역사를 대한민국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나는 어릴 적부터 우리 대한민국은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문화국가라고 배웠다. 하지만 깨우치면 깨우칠수록 우리나라는 전통을 다 없애 버렸고 그 자리에 현대를 심으려고 노력하되, 남 흉내만 내는 짝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 전통은 다 파괴되고 짝퉁만 넘쳐
대한민국의 60년 역사는 고유문화 파괴의 역사였다. 여기서 고유문화란 오래된 집들이나 의복 같은 고유한 생활 문화, 그 중에서도 무형문화가 아닌 유형문화를 말한다.
한국인은 자기 전통 의상을 가장 안 입는 민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왜 한복 전시회 같은 것 많이 하고 외국에서 한복 패션 쇼도 하지 않느냐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가끔이라도 한복을 입는 일이다. 한복이든 한옥이든 이제 모두 박물관 전시품으로 존재할 뿐이다.
외국에서 한류가 성행하지만, 막상 우리들은 우리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고유문화를 파괴해 왔다. 먹고 살기 바쁜 개발주의 시절에 낡은 것을 부수고 크고 멋진 것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그랬고, 우리 것이 촌스럽고 선진 외국 것이 멋있다는 생각에서 그랬다. 그런데 이제 조금 먹고 살 만해지니 우리 문화도 좀 내놓아야 하겠는데, 막상 내놓을 것이 없게 되어 버렸다. 그 동안 너무 파괴하고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를 보라. 서울공화국이니 서울이 대한민국의 반 이상이고, 서울을 보면 한국의 실상을 다 알게 된다. 서울에 “아, 여기가 한국이구나!”하고 느낄 만한 곳이 어디 있는가. 오세훈 시장이 ‘디자인 서울’이니 뭐니 해서 개발주의를 배격하고 좀 더 사람답고 세련된 도시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좋지만, 디자인 서울이 ‘디자인 영어’가 될 모양이니 그것 또한 커다란 문제다.
인천공항은 한글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사이에서 찌그러져서 어느 나라 공항인지도 모르겠더니, 최근에 한글문화연대에서 줄기차게 요구하여 그나마 한글이 조금 커졌다. 멋있는 공항 고속도로를 타고 오면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게 멋있다. 외국인이 즐겨 찾는 인사동! 이것이 한국 전통거리인가.
온갖 중국제 기념품과 서양 미술 화랑들로 매워져 있다. 물론 전통찻집이나 그림집들이 많이 있어서 한국임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역시 전시용, 관광용 거리다. 서울에서 옛날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고궁 몇 개와 북촌, 남촌 마을의 기와집들이다. 나머지 공간에서는 세월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한국 역사가 오천년이고 서울 역사가 육백년이라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세월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경복궁, 인사동 같은 박물관, 전시관에서일 뿐이다. 일상생활 속에서는 다 사라졌다는 말이다. 이런 말이 너무 과거지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 이렇게 자기 고유문화를, 생활 속에서, 못 느끼는 도시나 나라가 있는지 잘 알아보기 바란다.
■ 저질 개발주의가 빚은 자기부정
이는 비단 고유문화 보존이나 진흥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람들의 문화 수준 전체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도시에서 세월이 없어지는 것은 도시민의 문화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정체성이 희박해지는 것 또한 국민의 문화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문화의 중요성, 세월의 무게를 알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부수고 파헤치고 새로 짓는 것밖에 모르는 것은 저질 문화다. 이런 저질 개발주의 문화 덕분에 대한민국의 역사는 자기부정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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