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생명 창업자인 대산 신용호 씨(1917~2003)가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을 설립한 것은 국민교육 진흥이라는 기업철학의 반영이다. 생애를 일별하면 국권상실 시대에 독립운동가 집안에 태어나 온갖 고난을 겪으며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를 실현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일곱 살 때 폐병에 걸려 학교도 못 다닌 대산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천일독서(千日讀書)’를 목표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주경야독의 삶을 살았다. 그가 교보문고의 외벽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새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 1981년 광화문의 금싸라기 땅에 교보문고를 연 대산은 1991년 1월, 엉뚱하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는 글을 사옥 정면에 내건 것이다. 광화문 글판의 등장이다. 도전과 희망의 메시지 위주였던 글판은 1998년 2월, 고은의 시 <낯선 곳> 을 발췌해 올리면서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업 홍보를 생각하지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을 만들자는 대산의 뜻에 따른 변화였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라는 그 시는 글판 자체의 새로운 떠남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낯선>
▦ 그 뒤 광화문 글판은 2003년부터 정확하게 3, 6, 9, 12월에 새 글을 선보이며 시민들에게 감동과 활력을 주는 명물로 자리잡았다. 방황하던 제대군인이 이 글에서 봄의 희망을 얻고, 회의를 느끼던 공무원은 용기를 내 회사를 차렸다. 지금 걸려 있는 김용택의 시 <사랑> 의 한 대목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우리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도 따뜻한 긍정을 담고 있다. 광화문 글판은 사람이 아닌데도 ‘2007년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환경재단)에 선정됐고, 글판은 제주를 포함한 7개 시의 교보문고 사옥으로 늘어나 시민들을 응원하고 있다. 사랑>
▦ 글판에 올리는 글은 주로 문인들로 구성된 문안선정위원회가 자신들의 추천작과 30자 이내의 일반 응모작을 대상으로 심사한 뒤, 교보생명 브랜드통신원들의 투표를 거쳐 확정된다. 지금까지 선정된 것은 모두 시인들의 작품이다. 공간의 제약 때문에 원문을 바꾼 것도 있지만, 글판을 보며 책과 시의 힘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교보생명이 최근 발간한 책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는 글판의 모든 것을 잘 알려 주고 있다. 며칠 후, 9월 1일이면 새 글이 걸린다. 이번 당선작이 궁금하다. 광화문 글판은 시민들의 삶의 판이면서 마음판이다. 광화문에서>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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