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팍스 아메리카나'가 베이징에서 종말을 맞았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뜻하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냉전 시대 이후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다. 미국은 라이벌이었던 구 소련이 무너진 후 '무적 시대'를 맞았다. 정치, 경제는 물론 스포츠에서도 맞수가 없었다.
국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포츠계에서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의 권력을 마음껏 누려왔다.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진입 장벽을 허물고 석연찮은 판정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자국 시청자들의 편의를 고려, 각종 국제 대회의 경기 일정과 시간까지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고 했던가. 1996년 애틀랜타 대회를 시작으로 3회 연속 올림픽 종합 1위를 차지하며 최강을 뽐내던 미국의 스포츠 패권주의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며 미국을 위협했던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 51개를 따내는 괴력을 발휘하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당초 중국과 접전을 펼칠 것으로 전망됐던 미국은 '텃밭'에서 예상 밖의 흉작을 기록하며 금메달 36개로 멀찌감치 뒤졌다.
중국은 이번 대회에서 수확한 99개의 메달 중 절반 이상을 금으로 장식하는 개가를 올렸다. 미국(1952년ㆍ76개중 40개), 소련(1972년ㆍ99개중 50개)에 이은 세번째 기록이고 1988년 소련(55개) 이후 단일 대회에서 따낸 최다 금메달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과 함께 '팍스 시니카(Pax sinica)' 시대가 도래했다고 표현해도 좋을 급성장세다.
미국을 뼈아프게 하는 것은 전통적인 '효자 종목'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는 점이다.
수영에서 12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선전했지만 8관왕을 차지한 마이클 펠프스를 제외하고는 신통치 못했다. '변방'으로 분류되던 아시아 국가들이 무서운 성장세를 보인 점을 고려할 때 미국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수영 절대 강국'의 입지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육상 단거리의 몰락은 충격적이다. 미국은 이웃의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가 금메달 6개를 따내는 와중에 단 한 개의 금메달도 수확하지 못하는 굴욕을 맛봤다. 간판 스프린터 타이슨 가이는 100m 결선 진출에 실패한데 이어 400m 계주에서도 바통을 놓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며 미국 육상의 '재앙'이 됐다.
노메달에 그친 미국 여자 육상의 간판 로린 윌리엄스는 "우리는 수십년간 세계를 지배해왔지만 이제 자메이카의 시대"라며 미국 육상의 몰락을 시인했다.
통산 48개의 금을 수확했던 복싱에서는 사상 최악의 성적에 그쳤다. 9명이 출전한 미국은 헤비급(91kg 이하)의 돈테이 와일더가 동메달을 따냈을 뿐 나머지 8명은 준결승 이전에 탈락했다.
적수가 없어 보였던 소프트볼도 올림픽 마지막 무대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2012년 런던 대회에서 소프트볼이 퇴출된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국의 독주가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만 22연승을 기록 중이던 미국의 '철녀'들은 결승전에서 일본에 1-3으로 패배하며 눈물을 흘렸다.
미국의 몰락은 베이징 올림픽 최고의 화제지만 정작 당사자인 미국은 종합 1위를 빼앗긴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NBC 등 미국 언론들은 메달 총계로 순위를 집계, 자국이 1위를 차지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을 적용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미국이 유일하다.
지난 5월 시사전문지 뉴스위크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이미 무너졌지만 미국인들만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보도로 화제가 됐다. 스포츠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듯 하다.
김정민 기자 goav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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