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현 등 지음/서해문집 발행ㆍ252쪽ㆍ1만1,900원
"불명예스러운 꼬리표에 대해 부연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으나, 이미 나는 말이 없는 사자(死者)의 입장이어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오." 자신을 희대의 바람둥이, 호색한으로서만 묶어둔 역사의 평가는 엄청난 폭력이었다며 카사노바 백작이 고개를 쳐든다.
성도착의 대명사 사드 후작의 한풀이는 한술 더 뜬다. "도대체 난잡한 게 뭐요? 어떻게 하든 당사자들이 즐거우면 되는 것 아니오? 섹스하면서 상대방을 좀 때리면 어때요?" 자신은 결국 인간 고유의 '행복 추구권'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는 변명이다. 생의 3분의 1을 감옥에서 보낸 그의 항변은 과연 삐딱이의 원조로 삼을 만하다.
가상 현실도, 대체 역사도 아니다. 토인비의 말마따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부단한 대화"다. 그 생각을 끝까지 따라간 허구의 인터뷰 15편은 대담의 형식을 빌어 역사적 상상력의 끝을 보여 준다. 전문 연구자들이 각 인물의 핵심을 짚어 구상한 질문과 그에 따른 가상의 대답이 현재와 과거가 나누는 대화의 향연이다. 세간에 알려진 모습과 실체가 어긋나는 사람 7명, 최근 한국을 둘러싼 정황에 따라 새삼 주목 받고 있는 사람 8명 등 두 부류의 옛사람들이 전공 연구자들과 나누는 인터뷰 기사인 셈이다.
"기독교인들이 나를 죽일 놈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거기에 대해 별로 개의하지 않는다. 나를 희생양으로 해 신자들의 정신 건강에 도움 된다면 나는 역사적 소임을 다 한 것이다." 책에 의하면 지금껏 세상에서 가장 미움을 받은 사람 가롯 유다는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대학 비교종교학과)에게 자신의 역할에 대해 털어 놓는다. 그는 "또 하나의 어린 양"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변명의 기회가 주어짐은 물론이다. "내가 추구한 진정한 자유주의가 불륜과 탕아의 행각으로 곡해돼 안타깝다"며 카사노바가 경계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책은 엄정한 사실만을 다루는 강단 역사학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도 한다. 김옥균에게 동료들 중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누군지 묻는 등 역사적 거물들을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서 지켜보는 듯한 감회도 불러 일으킨다. "나는 내가 아니다"라며 일반적 해석을 거부라는 전반부의 주인공으로는 이 밖에 연산군, 흥선대원군 등이 초대된다.
한편 후반부의 "나는 나다"에는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체 게바라가 이산하 시인과 나눈 가상 대담이 눈길을 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가 최근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등 영원한 혁명의 상징으로 살아 있다는 시인의 말에 그는 "파멸돼 가는 이 세상에 적당히 타협하며 비겁하게 기여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을 뿐"(186쪽)이라고 담담히 받는다. "절권도가 다른 무술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들이다."(321쪽) 자기 무술의 요체를 한마디로 압축해 달라는 소설가 권정현의 가상 질문에 대한 이소룡의 가상 답변이다.
책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객관적 사실들은 스페셜리스트들이 제공하는 참신한 정보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최초의 판타지 소설가는 카사노바다. 난파선이 바다 속에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1788년의 소설 <자코시메론> 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의 모델이 됐다는 것이다. 히치콕과 영화 평론가 정성일과의 가상 대담은 한 마니아가 히치콕 영화들에 대해 보내는 헌사이자 잘 정리된 히치콕 영화론이다. 해저> 자코시메론>
책은 21세기 한국인에 위해 취사 선택된 과거이며, 그에 따라 다시 서술되는 역사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 현대사의 뜨거운 감자, 이승만 대통령(책에서는 '박사님')이다. '분단의 주범인가, 건국의 아버지인가'라는 제목의 대담에서 질문자는 과거사 정리 문제와 관련, 그가 친미파라고 하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약간은 신경질적 어조의 답이 돌아 온다. "우리에게 영토 야심이 없는 미국을 끌어들여 우리의 힘을 키우자는 게 잘못이라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지금 대한민국은 비축한 재산을 한가하게 까먹을 때가 아니라는 우국충정이다.
특히 지난 199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사가 "잘못된 민주주의로 무장된 사람들이 집권"(117쪽)한 탓이라며 후손들의 역사를 평가하는 대목은 이 가상 대담의 '현실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연산군편에서는 "이명박 정부는 일반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펴야 할 것"이라며 직접적인 충고를 하기도 한다. 자신은 비록 패덕했지만 선비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폈다는 것이다.(67쪽)
역사는 해석하는 자의 것이다. 같은 이치로, 인터뷰란 결국 인터뷰어의 것이다. 책이 일깨우는 또 하나의 진리다. 책은 청년 의사들의 문예지 '큐로'에서 2004~2005년 연재됐던 원고를 모은 것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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