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배영환 여섯번째 개인전 '불면증'/ 버려진 오브제로 빚은 '불면 도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배영환 여섯번째 개인전 '불면증'/ 버려진 오브제로 빚은 '불면 도시'

입력
2008.08.24 23:16
0 0

초록빛 유리 부엉이들이 온몸으로 백열의 빛을 내뿜는다. 넝쿨처럼 뻗어내려오는 길고 짧은 장식줄에선 크리스털의 찬란함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화려하다 못해 휘황한 대형 샹들리에.

어느 저택의 거실에나 걸려있을 법한 이 럭셔리한 샹들리에들은, 그러나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죄다 깨진 병조각들이다. 와인병, 위스키병, 맥주병에 구부러진 철사, LED 전구…, 그게 전부다. 버려진 오브제들의 화려한 부활.

한국 현대미술의 차세대 주역으로 꼽히는 배영환(39)의 여섯 번째 개인전 '불면증(insomnia)'이 서울 화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포스트민중미술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그는 한국 근ㆍ현대사를 작품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유행가 시리즈', '노숙자 수첩', '남자의 길' 같은 작품들을 통해 날카로운 사회의식과 현장성을 선보여온 작가. 청각장애학생들과의 협업을 비롯, 다양한 공공미술에 각별한 정성을 쏟아온 탓에 개인전은 3년 만이다.

전시 주제 '불면증'은 그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세계로 회귀한 듯 보이지만, 한국 사회의 대표적 징후이자 메타포로 채택됐다.

"2008년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공통분모를 뽑았더니 그게 바로 불면증이었어요. 물리적으로 봤을 때도 서울은 하나의 거대한 불면도시죠. 24시간 간판을 즐비하게 달고 있는 잠들지 않는 불야성의 도시."

불면증의 원인이 제각각 다르므로 작품의 개별주제도 조금씩 다르다. 히스테리로 잠 못 이루는 사람,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 연민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 그래서 피에타처럼 뻥 뚫린 뱃속에 새끼 부엉이를 배고 있는 어미 부엉이의 처량한 눈망울은 '걱정'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아주 럭셔리하고 궁상맞은 불면증'의 십수 마리 부엉이들은 화려할 대로 화려하지만 어딘가 지치고 히스테릭해 보인다.

그의 버려진 오브제들은 주로 밤새 길에 나와 있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불면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프랑스 소설가 장 주네의 <도둑일기> 속 한 구절, "나는 확신한다, 버려진 것은 그것 자체로 저항한다는 것을"이라는 말을 작가 역시 확신하고 있기에 그는 버려진 재료들을 고수한다.

쓰다 남은 나무토막으로 만든 '상사초'를 보자. 톱을 사용해 버려진 나무토막의 표피를 여러 겹으로 벗겨 놓은 후 물에 오랫동안 담가놓으면 죽은 나무가 꽃나무처럼 활짝 만개한다. 죽음이 삶으로 소생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죽음 이후에도 숙면을 허용하지 않는 불면의 강력한 횡포이기도 하다.

나무 새장 속에 톱밥으로 만든 줄자를 가둬놓은 '알바트로스'는 어떤가. 줄자의 눈금들은 모두 제 각각. 어떤 것은 1㎝가 2~3㎝만큼 길고, 어떤 것은 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주관과 주관이 서로를 가두는 거죠. 재즈의 그루브처럼, 정박 이외의 박자들이 아름다운데, 그게 각각의 개성인데도 서로 규격을 강요하고 있는 거예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등장하는 가련한 새 알바트로스처럼, 표준을 강요하는 세계화의 시대는 우리를 타인의 잣대로 포박한다.

온통 버려진 것들로 만들어졌지만, 그의 작품은 놀랍도록 럭셔리하고 예쁘고 부르주아적이다. 송판에 조각칼로 오선지를 그린 후 금색 물감을 바르고 그 위에 술병 조각으로 음표와 장식을 붙여넣은 '팝송: 아베마리아'는 중세 가톨릭의 황금악보처럼 휘황하고 현란하다.

"그런 얘기를 항상 듣는데 그게 저한테는 네거티브하게 다가올 때가 많아요. 파편들이 모여 군상을 이룰 때 그 외관은 더없이 화려하고 아름답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더럽고 궁상맞은 파편들일 뿐이에요.

'아주 럭셔리하고 궁상맞은 불면증'처럼요. 그렇게 거칠고 더러운 것을 예쁘고 럭셔리하게 만듦으로써 두 개의 레이어가 작동하도록 하는 게 제가 선택한 미술적 표현입니다. 단순히 예쁘고 럭셔리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형식의 반전이 핵심적인 거죠." 다음달 20일까지. (02)734-9467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