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 연수를 떠나기에 앞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대선 참패에 대해 "BBK에 너무 매몰됐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고 밝혔다. 많은 정치평론가들의 지적과 다르지 않지만, 당사자의 '복기'라서 여운이 특별하다. 총선에서도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에게 덧없이 패해 실의가 컸던 그가 산사 수련으로 마음을 추스른 후에 내놓은 자성의 변이어서 더욱 그렇다.
물론 그의 후회는 BBK 문제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았다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길 수 있었다거나 표차를 현격히 좁힐 수 있었다는 게 아니다. 다만 지더라도 유권자의 뇌리에 '정동영다운 무엇'을 남길 수 있도록 정책 차별화를 시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치인은 선거 다음 날부터 다음 선거 준비에 착수한다는 말이 있듯, 그의 자성도 당연히 두 번 다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재출발을 향한 다짐으로 들렸다.
패배의식과 불안의 산물
그런데 이런 그의 후회와 자성이 민주당 전체의 집단 성찰에는 이르지 못했던 모양이다. 18대 국회 임기 개시 82일 만에 가까스로 원 구성 합의에 이른, 보기 드문 국회의 장기 파행은 누가 보더라도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에 대한 민주당의 집착 때문이었다. 정 전 장관이 후회한 '매몰'과 민주당이 보여준 '집착'이 다를 리 없다. 배경이나 요인도 흡사하다.
첫 번째는 패배의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의식해 '열린우리당' 간판을 내리고, 정치공학적 효과를 겨냥한 '헤쳐 모여'를 거듭해 태어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후에도 정 전 장관은 '이명박 대세론'의 중압을 잠시도 떨치지 못했다.
정상적 선거운동으로는 질 수밖에 없다는 상황인식은 BBK 문제를 비롯한 네거티브 공세 일변도로 정 전 장관을 이끌었다. 4ㆍ9 총선 참패로 80여 석으로 단출해진 민주당의 인식도 다르지 않았다. 정상적 국회대책으로는 거대여당에 끌려 다니거나 압살되리라는 불안 때문에 떼쓰기 정치에 매달렸다.
두 번째는 정치적 호재에 대한 과대평가다. 많은 국민이 의혹을 가졌던 BBK 문제가 정 전 장관에게 호재였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드러났듯, 전력을 기울여 매달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가축법 개정안의 출발점인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촉발된 촛불집회도 무력감에 젖은 민주당에 희망의 불빛이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추가 협의와 추가 협상을 통해 '광우병 안전' 대책이 많이 보완된 후 촛불집회를 떠받치던 '민의'가 묽어지는 가운데 언제까지고 참신한 정치쟁점으로 남을 수는 없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변화를 감안하지 못한 착시, 즉 시대착오다. 정 전 장관은 BBK 문제에 매몰된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검찰 수사 발표를 들었다. 검찰 발표에서 거꾸로 BBK 논란의 히트 가능성을 확신한 것은 '정치 검찰'에 대한 과거의 기억에 의존한 결과다. 그러나 검찰의 행태는 물론이고 검찰수사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달라졌다.
민주당이 '촛불집회'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에 기대어 국회 정상화를 가로막아 온 것도 대규모 시위가 세상을 바꾼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협상 오류에 대한 분노가 모여든 시위가 아무리 정당해도, 방법이나 요구가 적절한 선을 넘으면 이내 외면하는 것이 지금의 민심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모든 논란을 정의와 불의, 독재 권력과 민주 시민의 싸움이라는 낡은 틀로 보려 하고 있다.
소수의 떼쓰기도 꼴불견
참된 새 출발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재발방지 다짐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 전 장관이 못내 아쉬워한 '지더라도 남기는 선거'는 예상된 패배를 수용하는 자세와 패자 나름대로의 역할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민주당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소수당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 그런 각성으로 다수의 횡포 못잖은 소수의 생떼와 결별하는 민주당의 모습을 보고 싶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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