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지 사람들의 손가락 크기를 고려하라."
구본무 LG 회장은 올해 초 그룹의 연구ㆍ개발(R&D) 성과보고회에서 휴대폰을 개발하는 연구원들에게 색다른 주문을 했다. 세계 각국 소비자들의 손가락 크기가 모두 다른 만큼, 휴대폰 자판을 개발할 때 이를 고려하라는 요구였다. 여기에는 고객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세심한 부분까지 미리 파악해 배려해야만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항상 고객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고객가치 경영'은 LG그룹 창업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정신이다. 이는 곧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와 '인간 존중의 경영'을 모토로 한 'LG웨이'로 다듬어졌다. LG웨이는 사업의 근간이 되는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이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고객 만족을 극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 '화장품에서 전자제품까지' 국민의 삶을 바꿨다
LG는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과 전자제품 시대를 열었다. 그만큼 LG의 역사는 국민의 삶과 궤를 같이 해왔다. 일제 강점기에 청년 시절을 보낸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은 '경제력을 키워야 민족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미 군정청이 승인한 최초의 무역회사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젊은 사업가를 눈여겨본 사돈지간이자 마을 만석꾼이던 고(故) 허만정씨는 셋째 아들인 고 허준구 GS건설 명예회장의 경영 수업을 의뢰하며 자본을 댔다.
이렇게 해서 1947년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가 탄생했다. 락희화학이 최초로 생산한 제품은 생활 필수품이던 '럭키크림'. 이 크림은 다른 제품보다 품질이 좋은데도 가격은 더 싸서 인기가 좋았다.
이때 구인회 회장은 "남이 하지 않는 일, 남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일로 소비자에게 더 좋은 제품을 제공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깨지지 않는 크림통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무리 내용물이 좋아도 포장이 허술하면 보잘 것 없는 상품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깨지지 않는 뚜껑 찾기'에 몰두한 구인회 회장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화장품통을 입수, 플라스틱이라는 소재를 알게 됐다.
"바로 이거야"라고 무릎을 친 구 회장은 셋째 아우 구태회 전무를 불러들여 다른 일은 다 그만두고 플라스틱을 만들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때부터 구 전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플라스틱 개발에 몰두, 1952년 국내 최초로 '깨지지 않는 화장품 뚜껑'은 물론, 빗 칫솔 식기류 등 플라스틱 가공 제품을 생산하면서 이 땅에 플라스틱 시대를 열었다.
당시 국내 최초의 플라스틱 제품인 '오리엔탈 빗'은 국무회의 때 이재형 당시 상공부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것이 바로 국산 빗"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럭키크림이나 오리엔탈 빗이 인기를 끈 것은 품질에 대한 구인회 회장의 남다른 고집 덕분이었다. 그는 "럭키 제품을 선택해준 소비자에게 언제나 더 좋은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기업인의 의무"라고 늘 강조했다. 국내 최초의 튜브 타입 치약이나 가루형 합성세제 '하이타이' 등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 제품들도 이 같은 고객 중심 경영의 산물이다.
LG의 고객가치 경영은 전자산업에서도 구현됐다. '남이 하지 않는 일'과 '이왕 하려면 최고의 품질'을 고집한 구인회 회장은 57년 형제들과 장남 구자경 상무를 불러놓고 라디오를 만들어 전자산업에 진출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미제, 일제가 버티고 있는데 경쟁이 되겠느냐"는 반대가 많았지만, 고객 입장에서 만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58년 금성사를 설립했고, 이듬해 국산 라디오가 나왔다. 한국 전자산업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고객가치 존중과 신사업 개척을 위한 도전정신에서 태동한 LG전자와 LG화학은 국내 산업의 여명기에 국민 생활에 꼭 필요한 치약, 플라스틱, 화장품, 가전 등 국내 최초 제품들을 쏟아내며 국민에게 사랑 받는 기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 'LG웨이'로 도약
70년대 구자경 현 명예회장이 2대 회장으로 취임하며 상호를 럭키로 바꾼 LG는 74년 반도패션(현 LG패션)으로 의류업에, 77년 럭키해외건설(현 GS건설)로 해외건설 사업에 진출했고, 78년 럭키석유화학(현 LG석유화학)을 설립해 종합화학회사로 도약했다.
LG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겪은 97년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기회의 발판으로 삼았고, 2003년 3월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를 출범시켰다.
'고객 우선'을 강조한 LG웨이가 경영 이념으로 정립된 것은 95년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면서부터. LG는 그 해 그룹 명칭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고, 사람의 웃는 얼굴을 닮은 상징을 제정하는 등 세계화 준비를 시작했다.
구 회장은 성장 일변도로만 달려온 그룹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2005년 LG브랜드 10주년을 맞아 "고객 가치를 선도하는 경영으로 미래의 변화를 주도해야만 100년을 넘어서는 위대한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LG웨이의 선포였다. 이는 즉각 직원들의 창의성과 자율을 존중하고 성과주의 경영을 통해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구체화됐다.
LG웨이는 LG전자의 휴대폰 사업에서 제대로 빛을 발했다. 휴대폰 사업은 2005년 적자를 기록할 만큼 힘들었지만, 고객의 욕구를 먼저 예측해 개발한 '초콜릿폰'과 '샤인폰', 명품 휴대폰 시장을 개척한 '프라다폰'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올해 세계 3강으로 떠올랐다.
특히 구 회장은 자신과 같은 중ㆍ장년층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휴대폰 개발을 직접 주문함으로써 고객 중심 경영을 몸소 실천했다. 2006년 4월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를 방문한 구 회장은 중ㆍ장년층을 겨냥해 휴대폰 글씨와 자판을 키우도록 주문했고, 그 결과 지난해 '와인폰'이 등장했다.
LG 관계자는 "고객 중심의 LG웨이 구현을 위해 올해 10조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라며 "여성용 크림을 만들던 락희화학이 전자ㆍ화학ㆍ통신서비스 등 36개 계열사를 거느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고객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기업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LG가 만든 국내 최초 제품들/ 럭키크림·금성라디오·마이티컴퓨터…
LG그룹은 국민 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제품을 많이 만들어왔다. 이 중에는 '국내 최초' 신화를 갖고 있는 상품도 적지 않다. '고객 가치 창조'라는 경영 이념에서 나온 이 제품들은 실제 국민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개선하는 역할을 했다.
▲크림
LG가 처음 내놓은 제품은 1947년 출시한 화장품 '럭키크림'. 갈색 용기 표면에 미국 여배우 디아나 다빈의 얼굴이 인쇄된 이 제품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디자인 탓에 '상하이에서 들어온 외제품'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돌았다. 덕분에 1통당 1,000원으로 타사 제품보다 두 배나 비쌌는데도 만들기가 무섭게 모두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치약
1954년 '럭키치약'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 국민들은 소금이나 가루치약으로 양치질을 했다. 튜브 용기의 럭키치약은 미국제 '콜게이트'를 제치고 그 해 국내시장 정상에 오르면서 국민들의 생활 습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후 한국 치약산업사는 'LG 치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럭키치약에 이어 1981년 출시된 '페리오' 치약은 20년 넘게 국내시장 1위를 지키며 지금까지 약 6억3,000만개가 팔렸다.
▲라디오
1959년 국내 최초의 라디오 'A-501'이 등장했다. 이른바 '금성 라디오'로 통한 이 제품은 단순히 최초의 라디오라는 상징성을 넘어 국내 전자공업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라디오 부품을 거의 생산하지 못하던 시절에 스위치, 트랜스, 소켓 등을 자체 개발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라디오의 부품 국산화율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60%가 넘었다.
값 비싼 외제 라디오 대신 국산 라디오가 등장함에 따라 1960년대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운동' 등 범 국민적인 라디오 보급이 진행되면서 국내 전파매체도 함께 발달했다.
▲합성세제
1966년 4월에 등장한 '하이타이'는 빨래 방망이와 비누에 익숙한 우리 주부들의 빨래 문화를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가루형 합성세제인 하이타이는 의외로 초창기에 주부들에게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혼식 하객들에게 축하 답례품으로 증정되거나 집들이 선물로 널리 쓰이면서 60년대 최고 히트상품으로 떠올랐다. 출시 30년 만인 1996년 매출 1조원을 넘어섰다.
▲TV
라디오 국산화 7년 만에 국내 최초의 흑백 TV가 개발됐다. 지금과 달리 4개의 다리가 달려있고 브라운관 앞에 여닫는 문이 있는 TV였다. 당시 가격은 쌀 27가마 값에 해당하는 6만8,000원. 엄청난 고가였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구입 신청을 하면 공개 추첨을 통해 판매할 정도였다.
TV를 대중화시킨 계기는 1975년 '샛별 텔레비전'의 개발이었다. 당시로선 가장 큰 17인치 화면을 갖춘 이 제품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광고 문구로도 유명하다.
최초의 컬러TV도 LG가 만들었다. 흑백TV 개발 10년 만인 1976년 국내 최초의 19인치 컬러TV 'CT-808'을 생산해 북미 지역에 수출했다.
▲컴퓨터
국내 최초의 소형 컴퓨터는 1982년 금성사에서 만든 '마이티'. 국내에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인 1970년 이미 컴퓨터 사업부를 신설한 금성사는 최초의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우리나라의 컴퓨터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1984년 국내 최초의 16비트 PC 'GMC 6011'을 개발했으며, 87년엔 '마이티-16 Ⅱ'를 내놓았다.
▲비닐 장판ㆍ선풍기ㆍ냉장고ㆍ휴대폰
이밖에 '비닐 꽃장판'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비닐 바닥재(1958년), 국산 모터 개발에 성공하며 출시한 선풍기(1960년), '눈표 냉장고'와 '백조 세탁기'(1960ㆍ69년), 1996년 1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그 해 2월 선보인 CDMA 휴대폰도 LG가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
최연진 기자 wolfpack@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