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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지도자' 화궈펑 前 中주석 사망/ 마오와 덩샤오핑 사이 '역사의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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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지도자' 화궈펑 前 中주석 사망/ 마오와 덩샤오핑 사이 '역사의 징검다리'

입력
2008.08.21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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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毛澤東) 사후 잠시 중국을 통치하다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실각한 화궈펑(華國鋒) 전 중국 공산당 군사위 주석은 중국 현대사에서 마오시대와 덩샤오핑 시대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존재였다.

20일 베이징에서 87세 일기로 숨진 화 전 주석의 일생은 마오쩌둥이라는 거목을 빼놓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1921년 산시(山西)성 자오청(交城)에서 태어난 화 전 주석은 38년 공산당에 가입해 유격전에 참전했다. 45년 자오청현 서기 등을 지내고 49년 신중국 성립이후 20년 가까이 후난성에서만 활동, 지방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후난성은 마오의 고향이었고, 자연히 마오는 고향에서 활동하던 젊은 화궈펑에 관심을 가졌다.

화궈펑은 66년의 문화대혁명과 71년의 린뱌오(林彪)사건 등으로 중앙 정계의 인사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도약을 기회를 잡았다. 그는 71년 중앙 정계로 진출, 정치국 위원 부총리 등을 거치면서 지도자 수업을 쌓았다. 이런 승승장구는 마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오의 지지만을 의지했던 화궈펑은 중앙 정계에서 이렇다 할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마오의 후계자로 낙점됐다. 마오는 죽기 직전인 76년 초 화궈펑을 총리에 임명하면서 화는 마오의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문화대혁명과 크고 작은 사건으로 인물이 마땅치 않았던 상황에서 마오는 키 크고 선량한 인상을 지니고 정치적으로도 모나지 않은 화궈펑에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마오는 당시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으면 내가 안심이 되겠다"고 말했다. 또한 마오는 화궈펑을 "영리하지는 않지만 아둔하지도 않다"고 평하기도 해 그가 최상의 선택은 아님을 시사하기도 했다.

76년 9월 마오가 사망하자 화궈펑은 당내 온건파와 협력, 장칭(江靑)을 위시한 4인방 등 당내 급진파를 제거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여기까지였다.

마오 사후 혁명 원로와 공산당 주류는 마오 덕택에 벼락출세한 젊은 화궈펑을 버리고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뭉쳤다. 수월하게 군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78년 화궈펑을 총리직에서 끌어내리고 80,81년에는 당 중앙위 주석직과 군사위 주석직 등을 차례로 박탈했다. 이후 그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다.

베이징=이영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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