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총기협회 (NRAㆍNational Rifle Association)는 미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이익집단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총기 보유에 반대하는 단체가 워낙 많아진데다 이들의 힘 또한 강해지면서 1990년대 들어 영향력이 다소 줄긴 했지만 그래도 NRA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버지니아 주 국도 66번, 한국 동포들이 많이 사는 훼어팩스 카운티의 현대식 4층 건물을 본부로 하고 있는 NRA는 1998년 유명 영화배우 찰톤 헤스톤을 회장으로 선출해 과거의 영향력을 되살리는 활동에 나서기도 했었다.
총기 보유에 대한 미국 내 반발은 만만치 않다. 이런 가운데 1997년 12월 찰톤 헤스톤이 자유의회재단(Free Congress Foundation) 에서 연설한 내용은 한동안 미국을 흔들어 놓았었다. 당시 연설은 여성을 비하하고 동성애자들을 경멸한 데다, 흑인을 여러 차례 비아냥거리면서 미국의 헌법을 쓴 사람들은 백인이고 미국을 창설한 사람들도 전부 백인 남성들이라고 강조해 물의를 빚었다. 헤스톤은 또 백인 남성들은 더 이상 백인이란 사실에 미안해 하지 말고, 총기를 휴대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말아야 한다느니, 미국의 전통이 혼탁해졌다느니 하면서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워 많은 미국인들을 당황케 했었다.
1993년의 일이다. 캘리포니아 주 남쪽 끝 샌디에이고 라는 도시에서 큰 음악회가 열려 그 지역 출신 연방 하원의원 2명과 함께 초대 받아 간 적이 있다. 당시 찰톤 헤스톤은 NRA 의 부회장이었고, 다음 회장에는 그가 만장일치로 당선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다. 음악회 무대 뒤에서 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헤스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동양 사람이 악수를 청하는 게 처음인 듯 다소 어색해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속으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니 이 양반이 어디 우주에서 왔나”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미 연방 하원의원 제이 킴이라고 소개를 했더니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는 “연방 하원의원에 동양인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다” 면서 “하와이 출신이냐” 고 물었다. 그래서 “바로 이곳 캘리포니아 출신”이라고 웃으며 답변을 했지만 속으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배우였기에 그 정도로 하고 참았다.
나오면서 등 뒤로 그가 주최 측을 향해 “저기 걸어나가는 저 동양인이 정말 캘리포니아주 출신 연방 의원이냐”고 묻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부터 30년을 넘게 존경했던 대배우 찰톤 헤스톤의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의 회장 취임식에 다수의 공화당 의원들이 참석했지만 나는 불참했다.
NRA도 다른 큰 이익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산하에 정치행동위원회 (PACㆍPolitical Action Committee)를 두고 이 위원회를 통해 모든 정치 활동을 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재선한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정치자금을 가장 많이 기부한 10개 PAC 은 다음과 같다.
Emily : 낙태 옹호 여성 후보를 돕는 PAC – 2,300만 달러
Service Employee International Union (서비스 노조) – 1,300만 달러
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 (전국교원연맹) – 1,300만 달러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미국의사협회) – 1,200만 달러
NRA (National Rifle Association) 전미총기협회 – 1,100만 달러
6위에서 10위까지는 거의 다 노조들이며 약 4,000만 달러 기부.
Emily 는 Emily 란 여성의 이름을 딴 단체로 주로 낙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 후보들을 위해 선거자금을 지원하는 가장 큰 PAC 이다. 미국의 여성단체가 얼마나 센지 이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NRA 는 선거자금을 뿌린 PAC 중 다섯 번째로 큰 단체다. 공화당 후보들 중에서도 총기 보유 자유를 주장하는 후보들에게 적극적으로 선거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NRA에 한 차례 위기가 왔던 적이 있었다. NRA의 위기라기보다는 총기 자체의 위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1981년 3월30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연설을 끝내고 호텔에서 나와 리무진으로 가던 중 25살 젊은 나이의 존 힝클리 (John Hinkley) 가 쏜 총에 맞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힝클리가 쏜 권총 6발 중 한 발에 맞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는데, 다른 한 발이 마침 그 옆에 서 있던 백악관 대변인 제임스 브래디(James Brady)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브래디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말을 더듬는 반신불수의 몸이 되었고, 브래디의 부인 사라(Sarah) 는 이후 남편의 휠체어를 끌고 전국을 다니면서 총기 휴대 금지 운동을 벌이는 등 NRA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이 때부터 미국의 여론은 양분됐다. 공화당은 브래디의 비극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수정 헌법 제2장에 보장된 신성한 권리 중 하나인 총기 휴대 법을 임의로 개정하는 건 옳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 민주당은 이른바 `토요일 밤의 스페셜’ 로 중국제 싸구려 권총을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총기 관련 사고가 빈번하다며, 총기 휴대 불법화를 요구했다. 특히 총기 휴대를 불법화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예를 들면서, 미국도 총이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도 공화당 출신이지만 총기는 어느 정도의 제재가 필요하다고 발언했다가 NRA의 맹공격을 받았고, 골수 보수파들로부터 혹독한 욕을 먹었다.
그러면 미국이 총기 휴대를 헌법상 권리로 택한 데는 어떤 배경과 이유가 있는 것일까. 다음호에 힝클리의 총에 맞아 반신불수가 된 제임스 브래디 백악관 대변인의 이름을 따 1993년 제정된 브래디 총기통제법 `The Brady Handgun Control Act’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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