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옳음'에 허기지고 목마를 때가 있습니다. '그름'이 득세를 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래서 내 삶이 억울해지고 만사가 허무해질 때 그러합니다. 사사로운 삶의 자리에서도 그렇거니와 한 시대나 한 사회를 살면서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그런 옳음이 저리게 아쉬웠던 세월을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옳음을 위해 그름에 저항하여 소리치고 달리고 마침내 목숨을 버리는 일조차 겪으며 '바라던 옳음'을 세웠습니다. 그러한 몸부림을 지금 우리는 '거룩한 분노'로 가슴 속에 아로새기면서, 하나의 사회와 역사를 일컫는 데서 아주 드물게 묘사할 수 있는 '경건한 회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네 기억 속에 그런 세월이 담겼다는 것은 지극한 축복이라고 여겨지기조차 합니다.
그런 세월을 거쳤다면 이제 우리는 옳음에 대한 갈증을 더 지닐 리가 없습니다. 옳음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차고 넘쳐야 마땅합니다. 그름은 옳음에 밀려, 또는 옳음의 밝음 아래에서, 겨우 구석에 머문 그늘처럼, 아니면 아예 '없어진 현실'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옳음이 철철 넘치는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또는 아무나, 모두 제각기, 옳음을 외치고 주장합니다. 숨통이 트인 세상은 이래서 좋습니다.
하지만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옳음이 무성한 숲속에 뜻밖에 다 가셔야 마땅한 그름이 옳음만큼 짙게 무성합니다. 옳음이 빛처럼 비치면 그름은 사라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옳음은 그 옳음의 주장과 선포 때문에, 아니 그 옳음의 존재 자체 때문에 수많은 그름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참 기이한 일입니다.
어쩐 일인지 오늘 우리가 겪는 옳음은 그름을 질책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를 옳음으로 드러냅니다. 지우고, 부정하고, 부숴야 하는 대상이 없으면 옳음은 아예 출현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옳음이 주장되는 자리에는 반드시 그 옳음이 빚어진, 또는 옳음 때문에 드러나는 그름이 함께 돋습니다. 무릇 옳음은 그름과 함께 있어 겨우 옳음입니다. 그러고 보면 옳음은 그름의 자식이라고 해야 그 출산의 계보가 엮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옳음이 가득한 오늘의 현실에서도 갈등과 쟁투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니, 그 옳음들이 갈등과 알력을 빚고 있습니다. 그 갈등이 옳음과 그름 간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간'에서입니다. 지금 우리는 옳음들이 빚는 소용돌이를 현기증 앓듯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득 지난 날, 우리가 옳음을 세워 그름을 물리쳤다는 사실조차 정말 그랬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우리는 옳음을 위해 소리치고 달리고 감옥에 가고 죽는 사람들을 아프게 '부러워'했습니다. 그 분들 덕에 우리가 트인 세상을 사는 복을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옳음을 선택한 그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는, 그래서 자기보신에만 급급한 기회주의자라는 지탄 앞에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자학을 살아야 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을 되 가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역사와 사회 앞에서 지녔던 '경건'도 터럭만큼이라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때 목숨을 버린 분들의 영혼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일도 여전히 영원한 의례여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데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옳음조차 옳음이어서 그름을 전제한 것이라면, 그래서 그 옳음조차 또 다른 옳음과의 갈등을 구조화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제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무릇 옳음을 실천하는 용기의 유무가 아니라 '옳음의 존재론'에 대한 더 깊은 생각을 우리가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옳음을 준거로 그름을 이야기해야지 그름을 준거로 옳음을 이야기하면 그것 자체가 이미 건전하지 못한 그름이라고 질책하신다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귀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거의 모든 옳음 주장의 주체들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사람살이에 '초월적이고 전제된 본질적인 옳음'의 선택이나 실천이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런 초월적인 옳음을 전유하고 있다는 신념은 귀하지만 바로 그러한 옳음들이 솟구치면서 '옳음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나아가 결과적으로 '옳음과 옳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혼미와 그만큼 다양하게 일컬어지는 '그름의 소용돌이'를 일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데 생각이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름을 준거로 하여 옳음의 출현을 논의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옳음 담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네 삶의 자리에서 보면 옳음이란 초월적으로 전제된 본질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느냐 하는 것과 연계된 것이라기보다 상황적인 주체적 선택에 속한 과제와 연계된 것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이를 설명해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수많은 선택 가능성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택 가능한 것을 단번에 다 아우를 수는 없습니다. 삶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기 때문입니다.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그 가능성 중에 어떤 하나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넓은 선택 가능성을 그 하나 때문에 닫아 버리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선택한 하나를 유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부정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부정직을 감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윤리적 실천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선택이 범한 '가능성의 차단'이라는 '과오'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불가피하게 자기 완결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늘 과오 가능성을 내장하고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계기에서 '옳음 주장의 윤리'를 거론해야 마땅합니다. 옳다는 주장만으로 옳은 것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옳음조차 그것이 자기 성찰적인 겸손함을 지니지 못하면 옳음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옳음은 그 옳음을 드러내기 위한 그름만을 양산할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옳음'이 있는가 하면 '오만한 옳음'도 있습니다. 자기를 살피는 옳음도 있지만 남을 저주하기만 하는 옳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옳음이 봇물같이 터진 오늘 우리 사회는 분명히 축복 받은 사회입니다. 하지만 '머뭇거리고 어눌한 옳음'이 왜 이리 아쉬운지요. 그러한 옳음이 들리고 보이면, 그리고 그런 옳음을 발언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옳음의 굉음'도 훨씬 뜸해지고 조금 더 성숙한 옳음을 숨 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 ·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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