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자랑’이란 말 그대로 자랑이다. 힘자랑, 장기자랑, 돈 자랑, 권력자랑(?) 등등처럼. 심지어는 음치자랑도 있는 판국이니까.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다르게 부르면 음치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만 모아놓고 경쟁 시키는 것이 음치자랑이다.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본인들이 더 재미있어 하니까 안타까울 것 까지는 없다.
심지어 ‘음치의 4대요소’라는 것이 있다. 1. 부르는 사람 즐겁고, 듣는 사람 괴롭다. 2. 가사는 절대로 안 틀린다. 3. 2절 3절까지 완창을 한다. 4. 앙코르가 없어도 한곡 더 부른다.
요새 일요일 아침 12시 조금 지나면 KBS 제1TV에서 ‘전국 노래자랑’이 방영되는데 이거 인기가 만만치 않다. 그리고 여기에도 음치들이 가끔 등장을 한다. 송해씨가 사회를 보는데, 사실은 70년대 이후부터 아나운서와 전문 사회자 등 여러 사람이 사회를 맡았었다. 일본 NHK의 ‘노도지만’이란 프로그램과 비교를 하는데 실제로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일본 쪽은 매우 엄격하다. 음정이 약간만 틀려도, 박자가 조금만 엇갈려도 ‘땡’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노래자랑은 어떤가? 너무 관대하다. 지나치게 관대할 때도 있다.
요새 노래자랑은 노래를 자랑 하려고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춤이나 코미디등 장기자랑을 하러 나오는 것 같다. 독특한 의상을 입는다든지 지방의 특산물을 홍보하기위해 나오는 것 같은 경우도 있다. 노래자랑의 본래 취지와는 동 떨어진 느낌이다.
전 세계에 노래자랑이 없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라디오나 TV 프로그램으로 방영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장 마당에서 상품을 걸고 판을 벌이기도 한다. 언젠가 북한의 평양에서도 노래자랑대회를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
50년대, 60년대에는 동네방네 노래자랑이 많았다. 딱히 오락 시설이 없던 때라서 돈이 크게 안 들고 즐길 수 있으니 너도 나도 노래자랑을 주최했다. 서울에서도, 한강변, 뚝섬, 용두동 개천가, 마포나루, 동대문 밖 동묘 마당 같은 곳에서 중소 규모 노래자랑이 열렸다.
훗날 강변가요제라든지, 대학가요제등도 결국 노래자랑인 셈인데 이런 자리에 출전해서 정식 가수로 데뷔한 사람들도 많다. 우선 이미자가 그렇다. KBS가 생기기전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국이 있었는데, HLKZ라는 호출 부호로 방영을 했다. 채널은 9번인데 나중에 화재로 인해 없어지고 지금의 KBS 제1TV가 그 9번 채널을 사용하고 있다. 그 HLKZ에서 생방송으로 노래자랑을 했는데 여기서 뽑힌 사람이 이미자다. 1959년이니까 그녀가 만 18살 때이다.
동아방송(라디오)이 1964년에 ‘가요백일장’이라는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때 제1기로 세 사람을 뽑았는데 김세레나, 김부자, 조미미가 그들이다. 김세레나와 김부자는 현재까지 활동을 하고 있지만 조미미는 쉬고 있는 모양이다. 혜은이, 이선희, 유열, 문희옥 등도 가요제 또는 노래자랑 무대에서 픽업된 가수들이다.
나는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노래자랑 심사를 많이 했다. 신문기자이면서 경음악 평론가로 활동을 했고, 방송 출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KBS, MBC, TBC(동양방송), DBS(동아방송)등 방송국 마다 나름대로 약간 성격은 다르지만, 노래자랑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단골 심사위원으로 뽑혀 갔다. 심사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더니만 점점 노하우가 생기니까, 재미가 있어졌다. 나중에는 심사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심사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아마추어들이 무대에 올라가면 얼마나 떨릴 것인가. 가사, 박자, 음정이 평소 실력대로 될 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 노래를 1절만 듣고 점수를 준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심사해야 한다.
69년인가 70년인가, KBS에서 노래자랑 심사를 마치고 차를 타러 정문으로 나가는데 건장한 청년 두 사람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덩치가 아주 크고 머리를 짧게 깎은 젊은이들이었다. 보나마나 뻔하다. 그중의 한 친구가 ‘고향무정’인지 ‘유정천리’인지 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내가 ‘땡’하고 불합격 시켰다고 따지러 온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아주 불편하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유순한 사람들이라 잘 타일러서 보냈다.
더욱 곤란한 것은 심사평을 할 때이다. 지금은 중견가수가 되어 있고, 사회활동도 많이 하고 있는 Y군이 신인일 때 내가 노래에 대한 평을 한 적이 있다. “개성이 있어서 좋지만 볼륨이 약하고 감정 처리가 지나치게 교과서적이다”라고 충고를 했다. 본인은 섭섭해 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했는데, 그이의 아버지가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엽서를 보내고 항의 전화도 몇 번 하시는 바람에 아주 애를 먹었다. 근래에 행사가 있을 때면 Y군을 가끔 만나는데 “자네 아버님께서--”하고 옛날이야기를 하려다가 몇 번 참았다.
한번은 60대 초중반쯤 되는 영감님이 한국일보로 나를 찾아 왔다. 그냥 온 것이 아니라, 계란이 열개씩 들어 있는 볏짚으로 만든 꾸러미 두개를 들고 왔다. 다짜고짜 계란 꾸러미 두개를 내 책상 위에다 올려 놓고는 “내 손녀 좀 잘 부탁합니다”였다. 자기 손녀의 꿈이 가수가 되는 것이고 이번 주 노래자랑에 나가는데 ‘땡’ 하지 말고 ‘딩동댕’해 달라는 것이다. ‘알았으니까 계란은 도로 가져 가시라“고 극구 사양했는데도 이 양반, 화를 내면서 기어코 계란을 놓고 갔다.
계란 20개를 뇌물(?)로 받아서가 아니라 그 손녀가 노래를 꽤 잘 했다. 아마 3등인가 했을 텐데, 그 뇌물 영감님은 그 후로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40년 전에 나이가 60대였으니까 그 분은 세상을 떠나셨겠지만, 손녀는 가수가 되는 꿈을 이뤘는지 아닌지, 원?
60년대에 노래자랑을 생방송으로 한 적이 있었다. 이건 매우 위험하다. “ㅇㅇ동에 있는 설렁탕 집으로 오셔요.” “신발은 xx양화점으로”하는 식의 돌발 행동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마추어가 출연하는 경우 거의 라이브로 하지 않는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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