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무어 라페 지음ㆍ우석영 옮김/이후 발행·272쪽·1만3,500원
한국은 늘어가는 올림픽 메달 수처럼 풍성한 민주주의를 길러 왔다고 믿어도 좋을 만큼 발전을 거듭해 왔을까?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산 쇠고기 파문은 우리가 과연 일상적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자괴감마저 불러 일으킨다. '촛불들'이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크게 봐서, 저 같은 고민은 글로벌하다. 삶의 공공성이 망실돼 가는 지금, 두 괴물 사이에 끼어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세계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 주범은 선거(민영화)와 시장(상품화)이다. 민간 자본이 선거 시스템에 개입하고 시장과 적극 연루돼 민주주의를 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범지구적으로 위기를 몰고 오는 주체는 정치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 조지 W 부시, 딕 체니 등이거나, 글로벌을 외치는 시장경제주의자들에게 있다. 9ㆍ11 이후 6년 동안 미국의 화학산업계는 안전 척도를 거부했고, 부시의 백악관과 유착해 있던 전 석유 로비스트는 기후 변화를 얕보도록 공식 보고서를 편집하기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민주주의가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최적화'해낼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검토할 때다. 민주주의도 기술(art)이다. 에리히 프롬의 명저 <사랑의 기술> 을 떠올리게 하는 책은 민주주의론의 최신 버전이다. <굶주리는 세계> 등의 책으로 국내에서도 낯익은 생태정치학자인 저자는 "어떤 기술도 학습될 수 있듯 민주주의 역시 배움을 통해 끝없이 향상돼 가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민주주의란 '고비용 저효율'의 사회 작동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굶주리는> 사랑의>
저자가 주장을 효과적으로 펴 나가기 위해 동원하는 개념적 장치가 '앙상한 민주주의(thin democracy)'다. 합리적 합의와 상호 소통을 불능케 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로, 미국 사회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의 현실적 정치 체제를 겨냥한 말이기도 하다.
그 반대로 책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행동의 통로를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정치 체제, 그것들이 시민의 힘에 의해 자율적으로 형성돼 가는 창조의 과정 등을 요체로 하는 민주주의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타인의 발언에 귀 기울이는 기술, 협상과 조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기술, 경험을 성찰하고 학습하는 기술들을 전제하는 민주주의다.
1999년 미국 캔사스의 한 고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절반이 중퇴하는 상황이 벌어진 사례는 민주주의를 몸으로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교육 붕괴의 원인이, 지역 주민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고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여기는 삶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들은 신뢰 회복을 위한 모임에서 서로 만나기 시작했고 학교 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민주주의의 생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8년 만에 고교의 졸업생 비율은 80%까지 상승했다.
책은 인간들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보편적 속성을 두고 '마음속의 리얼리즘'이라 표현한다. 부시 행정부가 2002년 이라크 침공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내놓았던 가짜 증거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해 일어설 수 있는 자신감과도 같은 것이다. 또 야만적 행위가 유발하는 공포감은 오히려 바람직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사용할 자원으로 쓰여질 수도 있다.
책은 희망적이다. 관계망을 추구하는 인간 고유의 속성, 개인적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공공성 등 의미 있는 행위와 삶을 향한 근원적인 욕구 때문에 인간은 속성상 공적인 존재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책을 옮긴 뉴사우스웨일즈대 사회학과 국제연구스쿨 대학원생 우석영씨는 "한국도 국민들의 정치 혐오증을 딛고 시민을 중심으로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구축해 갈 때"라고 밝혔다. '살아 있는 민주주의 체크 리스트' 등 작은 읽을거리가 자칫 이론적일 수도 있는 논의에 흥미를 보탠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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