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이라는 말은 내 의식의 밑바닥에서 사랑보다 희망과 더 가까운 자리에 놓여있다. 어린 시절 배운 <희망의 속삭임> (Whispering Hope)이라는 노래 때문이다. 미국 노래이긴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도 그 선율과 번안가사가 익숙할 테다. 희망의>
"거룩한 천사의 음성 내 귀를 두드리네/ 부드럽게 속삭이는 앞날의 그 언약을/ 어두운 밤 지나가고 폭풍우 개이면은/ 동녘엔 광명의 햇빛 눈부시게 비치네/ 속삭이는 앞날의 보금자리/ 즐거움이 눈앞에 어린다."
이 노래를 만든 이는 필라델피아 출신 작곡가 셉티머스 위너(1827~1902)다. 그는 본명말고도 '앨리스 호손', '마크 메이슨' '폴 스텐턴' 등 여러 예명을 사용했다. 위너의 어머니 메리 앤은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친척이었는데, 이 유명한 친척의 성을 위너는 제 예명 '앨리스 호손'의 일부로 삼았다. 주홍글씨>
그가 가장 애용한 이 예명의 퍼스트네임은 여자 이름이지만, 본명이나 다른 예명들이 드러내듯, 셉티머스 위너는 남자다. 그리고 본명의 퍼스트네임이 암시하듯('셉티머스'는 '일곱 번째'를 뜻하는 라틴어 '셉티무스'(septimus)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그는 메리 앤 부부가 슬하에 둔 7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위너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 덕분에 유명해진 노래 <열 꼬마 인디언> (Ten Little Indians, 본디 제목은 <열 꼬마 검둥이: ten little niggers> )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열> 열>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털어놓는 이야기
'속삭이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답게 얘기한다'는 뜻이다. 정답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딴 의성어 부사 '속삭속삭'의 '속삭'에 접미사 '-이다'가 덧붙어 동사로 전성된 말일 테다.
'속삭속삭'의 '속'은 혹시 '속'(內/裏)과 포개지는 것일까? '속삭속삭'을 의성어로 보는 한, 이것은 터무니없는 추리다. 그래도 그 두 개의 '속'을 포개는 건 우리들 맘이다. 속삭일 때, 우리는 보통 속말을 털어놓으니까. 더구나 우리는 더러 귓'속'말로 '속'삭이지 않는가?
속삭임은 정다움의 언어다. 희망을 속삭이든, 행복을 속삭이든, 사랑을 속삭이든. 심지어 가슴 아린 사연을 속삭일 때도 마찬가지다. 정답지 않은 사람에게 슬픈 얘기를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을 리는 없을 테니.
속삭임은 또 비밀의 언어다. 사실 이 비밀은 흔히 정다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 비밀-정다움을 신뢰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얘기를, 정답고 미더운 상대만 들었으면 하는 얘기를 우리는 속삭인다.
그런 얘기 가운데 사랑의 언어를 넘어서는 것은 없을 테다. 연인들끼리의 사랑은 가장 사적(私的)인 화제니까. 속삭임은 흔히 둘만의 언어고 닫힌 언어다. 속삭임의 주체와 대상은 배타적 동아리다. 그들이 연인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이익사회의 패거리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익힌 말로 '깜보'라는 것이 있었다. 이 어린이 은어가 지금도 살아있는지는 모르겠다. 내 세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 은어에 정확히 대응하는 표준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깜보는 동무지만 특별한 동무다.
아주 가까운 동무. 심지어는 배타적 동무. 한 아이와 깜보를 맺은(보통 새끼손가락을 걸거나 그 뒤 엄지손가락을 맞대는 '의식[儀式]'을 통해 이뤄진다) 아이가 또 다른 아이와 깜보를 맺는 것이 금지돼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은 깜보는 '의리'의 헤픔을 드러냈다. 가장 이상적인 깜보는 단둘만이 맺는 것이었다.
어릴땐 깜보, 커서는 연인끼리…
깜보 사이엔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제 깜보를 누군가가 해코지했을 땐, 반드시 힘을 합쳐 복수해야 한다. 깜보끼리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눠야 한다. 그들은 군음식을 나눠야 하고, 딱지를 나눠야 하고, 구슬을 나눠야 하고, 팽이를 나눠야 하고, 체벌을 나눠야 한다.
같은 성(性)의 아이들이 깜보를 맺는 것이 통례지만, 더러 계집아이와 사내아이가 깜보를 맺기도 한다. 또래의 아이들이 깜보를 맺는 일이 흔하지만, 나이 차가 나는 아이들끼리 깜보를 맺기도 한다.
이 깜보에 가장 가까운 표준어는 뭘까? 섹스를 할 나이는 안 되었으니, 깜보를 연인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형제나 자매나 오뉘도 아니다. 교실에서 한 책상을 쓰라는 법도 없으니, 짝(꿍)도 아니다. 그러나 깜보는 원칙적으로 동기(同氣)나 짝(꿍)이나 연인보다도 가깝다.
'단짝'이나 '짝패'라는 말이 떠오르긴 하지만, 이 깔끔한 표준어들은 '깜보'라는 말을 휘감고 있는 막무가내의 '의리'와 헌신의 분위기를 넉넉히 드러내지 못한다.
속삭임의 주체와 대상은 바로 이 깜보다. 깜보끼리 주고받는 말이 바로 속삭임이다. 깜보는 공동운명체고, 속삭임은 공동운명체의 언어다.
속삭임은 틘㎢芽? 그리고 건강하다. 그러나 깜보끼리의 나지막하고 배타적인 언어에 속삭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속삭이다'의 자매어라고 할 만한 낱말이 한국어에는 지천인데, 그 대부분은 뭔가 부정적인 함축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를테면 의성어 '속닥속닥'에서 나온 '속닥이다'와 '속닥거리다', 그 말들의 큰말인 '숙덕이다'와 '숙덕거리다', 이 말들의 센말인 '쏙닥이다' '쏙닥거리다' '쑥덕이다' '쑥덕거리다'는, 깜보의 언어이긴 하지만, 그리 아름답지도 정의롭지도 않아 보인다.
의성어 '속달속달'에서 나온 '속달속달하다' '속달거리다' '속달대다' '숙덜숙덜하다' '숙덜거리다' '숙덜대다' '쏙달쏙달하다' '쏙달거리다' '쏙달대다' '쑥덜쑥덜하다', '쑥덜거리다' '쑥덜대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 말들에선 뭔가 떳떳치 못한 목적으로 누군가를 해코지하려는 음모의 기미가 느껴진다. 의성어 '속살속살'에서 퍼져나간 '속살거리다' '속살대다', '쏙살거리다' '쏙살대다' '숙설거리다' '숙설대다' '쑥설거리다' '쑥설대다' 등도 처지가 비슷하다.
이런 부정적 뉘앙스는, 짙든 옅든, '소곤소곤'에서 나온 '소곤대다' '수군대다' '소곤거리다' '수군거리다', '쏘곤대다' '쑤군대다' '쏘곤거리다' '쑤군거리다'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심지어 '속삭이다'와 어근을 공유하고 있는 '속삭거리다'나 '속삭대다'마저, 접미사 '-거리다' '-대다'의 나쁜 기(氣)에 휘둘려, '속삭이다'의 기품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떳떳이 사랑을 속삭이고 희망을 속삭이고 행복을 속삭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숙덜대거나 행복을 숙덕거리거나 희망을 수군거릴 땐, 뭔가 개운치 않을 것이다. 미적 윤리적 거리낌을 느낄 것이다.
속삭임과 달리 숙덜댐이나 숙덕거림이나 수군거림에는, 어딘지, 추악(醜惡)의 뉘앙스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말들이 '기품'이나 '격(格)'이라 부를 만한 미덕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순결하고 낭만적인 사랑의 언어
속삭임은 미적 윤리적 거리낌 없이 입 밖에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타적 언어다. 그것은 수많은 '깜보 언어' 가운데 가장 순결하고 낭만적인 말이다. 그래서 그 많은 자매어들 가운데 오로지 속삭임만이 (거의) 유일하게 사랑의 언어가 될 수 있다.
물론 사랑을 가장 넓게 해석할 때, 편견에 물든 부정적 의미로까지 확대할 때, 속삭임의 다른 자매어들 역시 사랑의 말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때의 사랑은 대개 제3자의 염사(艶事)다.
우리는 유부녀 아무개와 그녀의 젊은 제자가 나누는 은밀한 사랑을 두고 수군거릴 수도 있고, 여자끼리 또는 남자끼리 나누는 사랑에 대해 숙덕거릴 수도 있고, 나이 차나 신분 차가 너무 큰 남녀의 사랑을 두고 숙덜댈 수도 있다.
'깜보'에 비길 만한, 가장 가까운 패거리들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깜보의 내부공간을 따뜻이 채워주는 정겨움의 언어가 아니라, 그 바깥으로까지 사납게 퍼져나가는 자기파괴의 언어이기 쉽다.
한국어는 필시 깜보의 언어행위를 가장 잘게 분류하는 자연언어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깜보의 말' 가운데 사랑의 말을 겸하는 것은 '속삭이다' 하나다. 그것은 한국인의 마음에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다는 뜻일까? 아니, 차라리, 좋은 것은 세상 어디에나 드물다는 뜻일 테다.
'속삭이다'는 또 그 자매어들 가운데 큰말(이를테면 '숙석이다')이나 센말(이를테면 '쏙삭이다')을 지니지 않은 유일한 '깜보어'다. 속삭임은 자립적이고 돌올하다. 지금 당장, 연인을 찾아, 깜보를 찾아, 사랑의 말을 속삭여보자.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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