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는 특별한 왕국이 있다. 2002년 간판을 내걸은 지역아동센터 '쪼물왕국'이다. '조무래기들의 왕국'이라는 뜻을 가진 이 곳은 이인숙(40) 교사가 어려운 환경 속에 삶의 비탈로 내몰린 아이들을 보듬어 안고 치유하는 곳이다.
부모가 재혼해 할머니 손에 자란 희재(13ㆍ이하 가명). 그가 쪼물왕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커터 칼로 자해를 하고, 할머니의 돈을 훔쳐 가출도 하는 눈빛이 매서운 아이였다. 그러나 이 교사는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며 희재를 기다려줬다.
부모의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희재는 이 교사의 헌신적인 사랑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 교사에게 요리를 해주는가 하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놀이치료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 교사의 도움으로 희재는 이제 쪼물왕국에서 꼬마 선생님 역할까지 한다. 자신이 만든 레고 모형과 요리로 공부방 동생들에게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형은(17)이는 어머니가 의료 사고로 장애인이 되면서 가세가 기울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생계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빠듯한 가정형편과 종일 시간을 빼앗는 아르바이트 탓에 학교 생활은 엄두도 못 냈다.
그런 형은이에게 쪼물왕국은 공부의 끈을 놓지 않게 해준 등대였다. 형은이는 주경야독 끝에 올해 고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당당히 합격했다.
이 교사는 "쪼물왕국은 간이역과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삶이 흐르는 과정에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지만, 어른이 된 뒤에도 잠시 돌아와 일상에 지친 삶을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단다. "할머니가 돼서도 이 곳을 거쳐간 아이들과 따뜻한 추억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이 교사의 소박한 바람이다.
현재 이 교사의 간이역에 머무는 삶의 여행객은 초등학생부터 고교생까지 모두 27명. 이 교사는 이들의 고된 짐을 덜어주려 항시 바삐 움직인다. 5월에는 CJ나눔재단이 운영하는 사회환원프로그램 'CJ도너스캠프'에 교복입히기 제안서를 냈다.
다행히 이 교사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개인 기부자들에게서 33만원을 지원 받아 3명에게 새 교복을 해 줄 수 있었다. 이 교사는 "툭하면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질만 하던 녀석이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교복을 입혀놓으니 왜 그렇게 멋져 보이는지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이 교사는 시설 아이들 돌보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1994년 오랜 산고 끝에 얻은 첫 아들은 미숙아였다. 동네 아이들을 모두 업어줬을 만큼 아이를 좋아했던 이 교사에겐 하늘이 무너져 내릴 일이었다.
아들 건강에 늘 노심초사하며 살던 이 교사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오히려 그 아이들도 가슴에 들여놓았다. "우리 아이가 행복하려면 모든 아이들이 행복해야 한다. 내 아이만 잘 키울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잘 키워 같이 힘을 모아 잘 살도록 해보자"고 결심했다.
이 교사의 집은 점차 모든 아이들의 열린 공간으로 바뀌어갔다. 도서관도 되고 분식집도 되고, 조무래기들의 놀이터도 되는. 비록 아들을 위한 것이긴 했지만, 자신의 집에서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은 행복 그 자체였다.
2000년 아이들에게 인형 하나씩 만들어 주겠다는 욕심으로 참석한 인형 만들기 모임이 이 교사의 운명을 갈랐다. "인형 하나에 들이는 정성과 사랑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질 것"이라는 강사의 말에 더 큰 희망을 일굴 결심을 했다.
이 교사는 드디어 2002년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작은 주차 공간에 자신만의 꿈터를 일궜다. 바로 지금의 '쪼물왕국'이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들과 씨름하며 부대낄 때면 배고픔도 잊을 만큼 행복했다. 얼마 전부터는 남편도 쪼물왕국의 사회복지사로 함께 일하고 있다.
2005년 12월 위기가 닥쳐왔다. 관할 구청이 무허가 공간이라며 퇴거를 요구한 것이다. 이 교사는 고심 끝에 그 동안 모아둔 돈으로 양평동의 허름한 연립주택 한 칸을 마련, 쪼물왕국을 이전하고 정식 지역아동센터로 등록도 했다.
이 교사는 최근 CJ도너스캠프에 아이들의 여름캠프 제안서를 올려 기부금을 모으고 있다. 소외 계층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성장하려면 정서 발달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교사는 도너스캠프가 지원하는 희망캠퍼스 워크숍에서 만나는 다른 공부방 교사나 지역아동센터 운영자들에게도 "이제 먹는 것, 입는 것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정서적인 문제를 치유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이 교사를 사회활동가로 변화시킨 연약한 아들은 이제 건강한 중학생이 됐지만, 그의 집은 여전히 아이들로 복작타객? "아이들이 내게는 삶의 의미이자 힘이다.
내가 주는 것보다 아이들이 내게 주는 것이 훨씬 많다. 이들이 맑고 건강하게 커야 우리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인 그의 한결 같은 바람이다. 이 교사의 꿈이 곧 실현되기를 빌며 환한 미소를 뒤로 했다.
■ CJ 희망캠퍼스/공부방·아동센터 교사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 기회 제공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 과격한 행동으로 공부방 선생님들의 속을 썩이는 철수(11ㆍ이하 가명),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결석이 잦은 현수(15)….
지역아동센터나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정서적으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곳 선생님들이 교사이기 전에 부모 역할을 자청하는 이유다. 하지만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사랑을 나누는 교사들에게도 충전의 시간은 필요하다.
교육부가 현재 교사 인건비로 지출하는 금액은 연간 24조원. 이 중 40만 교사의 재교육 연수비는 610억원으로 고작 0.25% 수준이다. 그나마 제도권 교사가 이 정도 혜택을 받을 뿐, 공부방이나 지역아동센터 같은 비제도권 교사들에 대한 지원 금액은 대폭 축소된다. CJ나눔재단의 CJ희망캠퍼스가 설립된 이유다.
CJ희망캠퍼스는 '선생님이 행복해야,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란다'는 모토 아래 만들어진 공부방 선생님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이다. CJ나눔재단은 2005년 소외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도너스캠프'를 설립, 수혜자와 기업, 개인이 함께 하는 '열린 나눔'을 지향하는 교육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역아동센터나 공부방 교사들을 초청, 약 5개월간 강의와 워크숍을 제공하는 'CJ희망캠퍼스'를 실시 중이다.
저명한 아동발달 전문가들이 강사로 나서며, 각지에서 온 공부방과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이 친분을 쌓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소중한 기회를 갖는다. 현재까지 56명의 교사들이 참여했다.
도너스캠프는 교사들이 강의와 교류 등을 통해 얻은 소중한 정보를 실제 교육현장에 접목시킬 수 있도록 자금도 지원한다. 교사들이 홈페이지(www.donorscamp.org)를 통해 제안서를 올리면 후원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에 참여하고, 재단에서 후원자의 기부금액과 동일한 금액을 매칭해 기부한다.
도너스캠프에는 전국 1,100여 기관이 등록돼 있고 6만1,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CJ나눔재단은 올해 6월까지 매칭펀드를 포함한 53억원의 누적 기부금을 전국 700여 곳의 공부방 및 지역아동센터에 지원했다.
CJ희망캠퍼스 관계자는 "현재 서울 및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지원 지역을 확대,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낙후지역 공부방 교사들에게도 재교육 프로그램의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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