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나이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이 아주아주 오래된 것 같은 느낌, 혹은 갓 피어난 빛처럼 지금 막 시작하는 느낌! 그 느낌을 따라가 보면 물리적으로 흐르는 것이라 믿어온 시간의 밖 겁외(劫外)입니다. 거기서는 모두가 한 생명이고, 모두가 사랑입니다. 우리 샤먼들이 대대로 불러온 서사무가(敍事巫歌)의 주인공 바리데기를 아십니까? 버려져서 바리데기입니다. 그녀는 그 시간 밖 겁외에서 사랑의 생명수를 길어 올린 여인입니다.
바리를 버린 것은 아버지 오구대왕이었습니다. 아들을 기원했으나 또 딸! 배반당한 기원은 종종 분노가 되지요? 왕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뜨겁고 독한 분노를 다룰 줄 몰랐던 왕은 미련없이 아이를 내칩니다. 분노로 인해 가장 소중한 존재를 버린 겁니다. 언제나 삶을 진창으로 만드는 것은 가까운 사람이지요? 부모거나 자식, 부부거나 연인! 그러나 보물도 그 삶의 진창에서 발견되는 걸 보면 상처가 보물의 재료인 모양입니다.
사실 우리는 분노하는 오구대왕이면서 버림받은 바리입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엔 버림받은 무엇인가가 응어리 되어 뭉쳐 있습니다. 그 응어리를 풀어줄 생명수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응석부리지 않고 진정하게.
그 바리가 생각난 것은 이준익의 영화 <님은 먼 곳에> 를 보면서였습니다. 님을 찾아 헤매는 순이는 근대판 바리데기네요. 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님을 만나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이, 님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도 없이 삶이 인도하는 대로 꿋꿋하게 님을 찾아간 여인 순이의 라스트 신을 두고 말이 많지요? 나는 그 라스트 신이 생명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님의 거짓 절망, 거짓 분노, 거짓 두려움을 일깨우는. 그 라스트 신은 시간 밖 겁외에 도달한 여인의 행동입니다. 님은>
거기 겁외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시간을 살고 있는 거지요?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삶은 소유고 업이지만, 바리와 순이를 따라가다 보면 삶은 소유가 아니라 경험입니다. 되풀이되는 업(業)이 아니라 그 업을 뚫고 나오는 각성입니다. 진정한 삶은 몸을 던져 도달하게 될 사랑입니다.
이주향ㆍ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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