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에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 35년의 세월이 흘러 1945년 8월에 나라를 되찾고 3년 뒤 분단 상태에서 남북 각기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올해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기념하여 '건국 6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건국 60주년, 과연 적절한 규정인가? 사회 일각에서 강한 의문 제기가 있다. 이것이 기정사실화되면 민족사에 빛나는 3ㆍ1만세 시위운동과 그것을 배경으로 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가 소홀히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말ㆍ임시정부 부정하는 용어
1919년 9월에 수립한 상하이 임시정부는 분명히 헌법 전문(前文)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국인은 기미 3ㆍ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고 했고, 제헌헌법도 3ㆍ1운동의 독립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 두 가지의 계승을 명시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2008년에서의 '건국 60주년'은 분명한 잘못이다. '건국'을 주장하는 측도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남북 분단 상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역사를 높이 평가하여 1948년의 정부 수립부터 진정한 건국으로 보자는 견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이 우리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아픔을 다시 되살아 나게 하여 선뜻 호응이 가지 않는다.
임시정부와의 계승관계 이전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경위부터 알 필요가 있다. 임정 수립 준비위원들은 당초 국호를 조선공화국으로 준비했다. 그러나 대의원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긴급동의가 있었다. 즉 수개월 전 대한문 앞에서 고종황제의 죽음을 애도하여 울려 퍼진 만세시위의 함성은 대한제국 황제에 대한 충성의 표시이므로 그 제국을 계승하는 민국의 뜻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제안이었다.
이에 큰 박수 속에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하였다. 임정 1차 헌법은 영토의 계승과 구황실 우대에 대한 규정을 두어 국가 승계관계를 명확히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대한제국의 대한(大韓)은 무슨 뜻인가? 1897년에 대한제국을 출범시킬 때, 고종황제는 스스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안하면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즉 조선이란 국호는 500년간 사용해온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중국과의 사대 관계 속에 정해진 부끄러움이 있으므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그 대신 상고 이래 우리 민족이 조선 다음으로 많이 사용했던 한(韓)을 택해 새 국호를 삼자고 했다.
황제의 이런 국가주권 의식은 1899년 9월 청국과의 근대적 조약으로 한청조약(韓淸條約)을 체결시켰다. 1948년 7월 1일 제헌국회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였을 때, 초대 부통령으로 선임되는 이시영(李始榮)은 이 국호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즉 한청조약은 "대청국 대황제 폐하가 대한국 대황제 폐하에게 삼가 묻는다"는 구절이 들어가 있듯이 500년 이래 처음 이루어진 쌍무계약으로 치외법권까지 일체 평등이었으니 우리가 지켜야 할 국호라고 하였다.
이시영은 조선왕조의 홍문관 교리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임시정부를 이끈 경력으로 부통령에 피선된 우리 근현대사의 진정한 흐름을 스스로 보여준 유례가 없는 인물이다.
정작 버려야 할 건 근대사 자학
오늘날 '한말'은 버리고 싶은 역사로 알고 있는 국민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가 우리 근대사를 왜곡한 결과이다.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 다시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근대국가를 만들어온 사람들에게는 그런 자학사관이 없다. 근대사에 대한 자학은 아직도 일제의 정신적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광복 63년에 이런 담론을 내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최근 다행히 사회과학계에서도 대한제국의 국가주권 수립의 공을 인정하여 개인주권 실현의 과제를 더 선명히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임정 법통의식에서 광복시대를 보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실현의 역사가 이렇게 더 빛나고 자랑스러우니, '건국 60주년'의 계속 사용 여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한국사 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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