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우리의 정치 풍토는 '색깔'이니 '공안'이니 하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세계적인 '풍경'이 되어 있는 '분단국 현실'을 현재형으로 가지고 있어서인가. 우리와 유사한 경험을 현재의 역사로 공유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를 나는 돌아보게 된다.
상황은 물론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과 대만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의 학술회의에서는 대만 홍콩 등지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 대만의 중국공산당 연구의 핵심 연구기관인 정치대학 동아연구소 박사과정 학생까지 참여하여 논문을 발표하면서 서두에 중국인들에게 "내가 수학하는 데가 뭐하는 데인지 아느냐"고 되묻고 있었다. 냉전 시대 대만에서 중공(中共)을 연구하는 중국인의 기관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인문, 사회,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적 풍토 모두가 다른 중국 대륙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화교 등 다른 지역은 모두 아마도 중국인이라는 단 한 가지로 공동의 문제들을 서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고 토론하며 교류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회체계 속의 동일 민족의 중국인이 공동으로 연구하고 협력하는 모습은 학문과 사유방법의 '다양화'의 열린 사회의 추형(雛形ㆍ어떤 물건의 원형을 그대로 줄여 만든 꼴)적인 모델을 제시해 주기 충분했다.
일찍이 중국 경제개혁 성공의 근원적이고 환원적인 이유 한 가지만 설명해 보라는 자문(自問)을 했는데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얻은 결론은 중국 민족성과 문화의 유연성, 현실 적응력 같은 것보다도 가장 직접적으로는 세계 각지의 '애국적인' 화교의 존재와 역할이 아니었나 싶었다. 아직도 구체적 근거 없는 이 생각을 수정할 생각이 없다.
국가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만들어 가는 또 한 가지 보다 근본적인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이데올로기' 처리의 방식이 아닌가 싶다. 국가적인 중요한 일, 크고 작은 각종의 사회 아젠다를 수행할 때 꼭 걸림돌이 되는 것이 소위 '색깔'이다. 우리 분단국에서는 흔히 발생할 수 있는 고질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문화혁명이 종지부를 찍자마자 바로 사고의 대전환을 시도했다. 즉, '실천'하자는 것이다. 무엇을 '실천'하자는 말인가. 바로 '따지지 말자'는 한 마디를 '실천'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논리였다. 무슨 일이든 그 성격이 무엇이고 이런 것은 백해무익이다. 무슨 일이든 그것의 성(姓)이 자(資), 즉 자본주의이든, 성이 사(社), 즉 사회주의이든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간 어떠했나. 명분과 정략, 정치투쟁 같은 차원과 실용과 절충, 실리와 적극적인 '기회주의' 차원과의 괴리와 차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소모와 낭비, 국력의 집중, 효율과 국가의 보편 가치의 획득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자신의 상대방에 대한 모략과 투쟁에 골몰하는 것과 '실천'을 해서 그 일을 완수함으로써 그것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논리와의 차이를 느끼지는 않을까. 이것이 민족성으로 환원되는 설명인가 아니면 역사 조건의 한계인가. 지금이라도 곰곰이 되새길 일이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왜냐하면 첫째, 우리의 분단극복 의식 차원의 노력이 될 수 있고 둘째는 중국에 대해 유효한 이해를 얻어 전략적인 대처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상옥 전주대 중국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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