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말을 빌면 작가는 "제 몸의 기억 저 안쪽에 새겨진 장소를 불러내 눈부신 상상력으로 지은 옷을 입히는" 존재다. 무속적 상상을 보태 문학은 작가라는 영매(靈媒)가 실재와 구체의 공간인 땅(지역)에 발딛고 서서 무형과 추상의 상상력을 불러들이는 데에서 탄생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그렇다면 문학 작품 이해에 있어 그 배경이 된 지리적 공간의 면모와 그곳에 묻힌 작가의 내밀한 경험을 살피는 것은 뜻 깊다.
한국일보는 오늘부터 6회에 걸쳐 자기 문학의 지리적 근원을 밝히는 우리 시대 대표 작가 여섯 명의 글을 싣는 기획 연재 '내 문학의 뜨락'을 마련한다. 필진은 정호승 김주영 김명인 안도현 성석제 문태준(연재순)씨로, 이들은 8~11월 경북 지역의 작품 배경지를 독자들과 직접 여행하고 산문을 기고할 예정이다(표 참조).
문화예술 전문 여행사 '파라다이스티앤엘'이 주관하는 이 경북 문학투어는 문학서비스단체 '문학사랑'과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하고, 경북도청ㆍ교보문고ㆍ대산문화재단이 후원한다. 첫 회로 정호승 시인이 9일 청도 운문사를 다녀와 글을 보내왔다.
그대 지하철역마다 절 한 채 지으신다/ 눈물 한 방울에 절 하나 떨구신다/ 한손엔 바랑/ 또 한손엔 휴대폰을 꼭 쥐고/ 자정 가까운 시각/ 수서행 지하철을 타고 가는 그대 옆에 앉아/ 나는 그대가 지어놓은 절을 자꾸 허문다/ 한 채를 지으면 열 채를 허물고/ 두 채를 지으면 백 채를 허문다/ 차창 밖은 어둠이다/ 어둠속에 무안 백련지가 지나간다/ 승객들이 순간순간 백련처럼 피었다 사라진다/ 열차가 출발할 때마다 들리는/ 저 풍경소리를 들으며/ 나는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다니는 사내처럼 운다/ 사람 사는 일/ 누구나 마음속에 절 하나 짓는 일/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마는 일
-'지하철을 탄 비구니' 전문
어느 여름날 자정 무렵, 한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다. 한손엔 바랑, 한손엔 휴대폰을 들고 전동차에 앉아 어디론가 자꾸 전화를 하고 있었다. 분명 보고 싶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한테 전화를 거는 것 같아 자꾸 눈길이 갔다. 이 꽃처럼 젊은 여성, 비구니 스님이 왜 무엇 때문에 출가했을까.
나는 궁금증이 일어 내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하나의 절이 떠올랐다. 운문사. 비구니 스님 300여명이 공부하는 승가대학이 있는 절 청도 운문사. 나는 그 스님이 여름방학을 맞아 그리운 집을 찾아가는 운문사 학인스님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지하철 전동차 안이 하나의 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스님이 지금 전동차 안에 수없이 많은 절을 지었다 허물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사람 사는 일, 마음속에 절 하나 짓는 일이 아닐까,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무는 일이 아닐까. 나는 지하철이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스님을 바라보다가 졸시 '지하철을 탄 비구니'를 쓰게 되었다.
내겐 1966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운문사 경내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다. 당시 대구에 살던 나는 여름방학 때 무전여행을 떠났는데 첫 행선지가 청도 운문사였다.
밀양 쪽에서 높이 1,000 미터가 넘는 운문산을 하루 종일 어두워질 때까지 넘다가 평지가 나타나자 그곳이 어디인 줄도 모르고 탈진한 채 쓰러져버렸다.
기진맥진, 이대로 있다간 죽겠다 싶어 새벽에 눈을 떴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배낭을 뒤져 그 시절엔 귀했던 설탕을 한 움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기운이 조금 나는 것 같았다. 나는 텐트 밖으로 기어 나와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곳은 바로 운문사 소나무 숲속이었다. 갑자기 엄마 품속에 안긴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운문사는 이렇게 탈진해 쓰러진 어린 나를 살린 곳이다.
이번에 운문사를 찾게 된 것은 40여 년 전 시인이 되고 싶었던 나를 다시 찾아간 길이다. '호거산운문사(虎踞山雲門寺)' '운문사승가대학' 두 석주가 서 있는 길 양쪽으로 소나무들이 울울창창했다.
구부러진 소나무 아래 한 할머니가 젖가슴을 잠시 드러내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는 모습이 문득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만난 듯 반가웠다.
시가 침묵으로 이루어지고 부처님 또한 침묵으로 말씀하시듯 운문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대신 교무스님이신 운산스님께서 만세루에서 "1초 전이 전생"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바로 "한 생각 전이 전생"이라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듣자마자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시 시인으로 살아갈 용기가 솟았다.
그동안 전생은 어느 한 시공간에 형성돼 있는 부동의 생애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전생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의 생이라는 것을, 지금 현재의 나의 삶이 나의 전생이라는 것을 나만 몰랐던 게 아니었을까.
아마 그래서 운산병途꼈??"이미 저지른 업은 할 수 없고 지금이라도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듯하다. 그동안 나는 시를 통하여 구업(口業) 신업(身業) 의업(意業)을 얼마나 지었는지 시인으로서의 내 부족한 삶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족한 것은/ 소리를 내지만/ 그러나 가득 차게 되면 조용해진다/ 어리석은 자는 물이/ 반쯤 남은/ 물병과 같고/ 지혜로운 이는 눈물이/ 가득 담긴 연못과 같다. -수타니파타
그래서인지 나는 '불이문(不二門)' 게시판에 씌어 있는 이 글을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읽고 또 읽었다. 관음전에 한 학인스님이 고요히 홀로 단좌하고 있는 뒷모습 또한 운문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겨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까.
마침 운문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청담미술관에서 빗재 김용문씨의 막사발전이 있었다. 이번 전시회는 김용문씨가 만든 막사발 60여개에 내가 직접 못과 붓으로 시의 한 구절을 써서 구워낸 것이다.
나는 그 막사발을 보고 그릇이 비어 있는 공간에 의해 완성되지만 그 빈 공간 또한 '가득 차 있는 빈 공간'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동안 시를 써온 35년 동안의 세월이 하나의 막사발이라면, 그 '시의 막사발'에 빈 공간이 얼마나 가득 차 있었는지, 행여 너무 비어 있어 요란한 '시의 소리'를 낸 것은 아닌지 자못 부끄럽고 염려스럽다.
山寺, 탈속·성찰의 상상력 부여문인들 영감의 원천·창작의 산실
사찰과 한국문학
정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5월 현재 지자체에 등록된 사찰 수는 930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아서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경우 지난해 말 종단 소속 사찰 수가 정부 등록 사찰(703개)의 3배를 넘는 2,444개에 이른다.
통일신라 중기 이후 내적 성찰을 중시하는 선종이 성행하면서 절은 주로 깊은 산속에 자리잡았다. 이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속세와 떨어져 자리한 절들은 고래로 한국 문학의 단골 글감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특히 산업화ㆍ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는 현대에 있어 산사(山寺)는 문학에 탈속과 성찰의 상상력을 부여한다. 정호승 시인은 시 '선암사'(전남 순천)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면서 절이 지닌 정화와 치유의 힘을 노래한다.
소설가 신경숙씨는 어느 해 정월 초하루 저물녘 처음 찾아간 부석사(경북 영주)에서 서먹했던 동행과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해준 고즈넉한 분위기를 떠올리며 단편 '부석사'를 썼다고 밝힌다. 신씨는 이 작품으로 2001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아예 절을 문학의 산실로 삼는 작가도 많다. 김동리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이듬해인 1937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솔사(경남 사천)에 기거하면서 창작에 매진, 소설가로서 입지를 확고히 한다.
그에게 '바위'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등 대표작의 모티프를 제공해준 다솔사는 동리 문학의 물적ㆍ정신적 토대다. 한용운의 명시집 <님의 침묵> 집필처로 유명한 백담사는 지금도 문인들이 글을 쓰러 즐겨 찾는 곳이다. 님의>
서울대 교수 시절부터 겨울마다 이 절 요사채에 머물고 있는 오세영 시인은 "무연히 설악의 산봉우리를 바라만 봐도 저절로 선리(禪理)를 깨우칠 듯만 싶은 곳"이라고 말한다.
절은 종종 작가에게 서정 너머를 환기한다. 김해자 시인이 개심사(충남 서산) 내 연리지(連理枝ㆍ가지가 서로 붙은 두 나무)를 보며 '다리가 하나뿐인 나무처럼 모자란 내 몸이/ 개심을 하는 길은 먼저 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연리지') 깨닫는데, 이는 정서보단 (불교적) 사유에 가깝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대하소설 <장길산> 의 대단원에서 운주사(전남 화순) 와불(臥佛)이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잡길 염원하는 민중들의 합작으로 탄생했다고 묘사하며 정치사회적 상상력을 한껏 지핀다. 장길산>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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