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변죽만 울렸다. 11일 발표된 1차 공기업 선진화 방안은 숫자 부풀리기, 보여 주기에만 급급한 모양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거의 반년을 매달린 결과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정권 초기에 밀어 부치지 않으면 공기업 개혁은 불가능하다"던 정부의 우려가 현실이 된 셈이다.
법적 절차도 완전히 무시됐다.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공공기관운영위원회나 공기업선진화추진위원회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여당과 정부가 합의한 방향이 곧 최종안이었다.
그나마 공기업 개혁의 첫 발을 뗀 것이 다행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볼 때 앞으로 몇 걸음이나마 더 나아갈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해 보인다.
개혁은 없었다
당초 출발은 공기업 개혁이었다. 방만한 경영을 일삼으며 민간과 불공정 경쟁을 하는 상당수 공기업에 메스를 들이대겠다는 것이었다. 역대 정부에서 번번이 실패했지만, 현 정부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발목을 잡은 것은 '촛불'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국정이 혼돈에 빠지면서 개혁 드라이브에 제동이 걸렸다. '개혁'이라는 단어도 '선진화'로 대체됐다. 당초 50~60개 달할 거라던 민영화 대상 공기업은 하나 둘 제외된 끝에 결국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전략 부재도 한 원인이었다. 국책연구기관 한 관계자는 "1, 2개 핵심 공기업을 집중적으로 개혁하는 전략이 필요했다"며 "초기부터 모든 공기업을 개혁 대상에 올려 놓음으로써 제대로 된 개혁 자체가 불가능해졌다"고 지적했다.
숫자 부풀리기라는 '꼼수'까지 동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민영화 대상 공기업 27곳 중 대우조선해양 등 공적자금 투입기관 14곳을 제외하면 13곳. 여기에 이미 민영화 작업이 진행 중이거나 민영화 방침이 사실상 확정된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계열사 7곳을 빼면 고작 6곳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뉴서울컨트리클럽 경북관광개발공사 등 '만만한' 공기업 뿐이고, 인천국제공사는 지분 49%를 매각하겠다는 것이어서 민영화라고 하기도 쉽지 않다.
법 무시한 절차
이날 오전 당정협의에 앞서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은 1차 공기업 선진화 대상 기관을 33곳으로 보고했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뒤 언론에 배포된 보도자료엔 대상 기관이 41곳으로 늘어났다. "숫자를 늘리라"는 한나라당의 강력한 요구에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계열사,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8곳이 부랴부랴 민영화 대상에 추가된 것이다.
정작 안건을 심의해야 할 공기업선진화추진위원회가 열린 것은 이날 오전 10시30분. 이미 당정협의 후 수정된 내용으로 보도자료가 배포된 뒤였다. 사실상 사후 심의이자, 거수기였다. 게다가 상위 기구인 공공기관운영위원회는 아예 열리지도 않았다. 당정이 법적인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통행 식으로 밀어 부쳤다는 지적이다.
앞으로 잘 될까
물론 이 정도만으로도 의미 있는 첫 단추를 뀄다는 평가가 있기는 하다. 발표된 내용이 제대로 추진되기만 해도, 공공 개혁에 적잖은 진전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길 역시 순탄치는 않아 보인다. 이번 선진화 방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택공사와 토지공사는 통폐합이라는 원칙만 확인했을 뿐 세부 방안이 없다. 노조, 지방자치단체 등의 힘겨루기를 감안하면 통폐합이 차일피일 미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차, 3차 선진화 방안에도 큰 기대를 하긴 무리다. 김동렬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공기업 개혁이 국정 아젠다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추가적인 방안도 큰 기대를 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더구나 공기업 사장에 '낙하산 인사'들이 속속 안착하면서 향후 공기업 개혁에 상당한 장애물이 될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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