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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동원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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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동원의 추억

입력
2008.08.1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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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동창 모임에 갔었다. 한 친구가 1980년대 초 고교 시절 동원(動員)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는 김포공항 근처에 있는 학교에 다녔는데 이 숙명적인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각국 대통령이 왕림하실 때마다 거리 환영을 위해 ‘강제징집’되곤 했다.

한 번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 대통령이 일요일에 왔는데 친구 학교는 그때도 예외 없이 동원됐다고 한다. 학생들이 길에 모두 모이자 교련 교사는 거리 환영 매뉴얼을 친절하게 일러 줬다. “깃발은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맹렬하게 흔든다. ‘환영합니다’라고 쉼 없이 외친다. 목소리 크기는 120㏈(데시벨ㆍ소리의 단위로 120㏈이면 사람이 듣기에 고통스럽다고 함).”

휴일에 끌려 나온 것도 언짢은데 교련 교사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 대자 열이 확 오른 친구는 다른 매뉴얼은 모두 지켰지만 ‘환영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옆에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키득거렸다. 친구는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확 풀고 집에 갔다.

그런데 다음 날 등교해 보니 자신의 행동은 엄청난 사건으로 진화해 있었다. 전날 밤 TV 뉴스에 자신이 한 짓이 고스란히 포착돼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만 봐도 욕을 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교련 교사에게 끌려가 야구 방망이만 한 훈육봉으로 죽도록 맞았다.

이 친구 얘기가 끝나자 나머지 친구들도 지지 않고 자신들의 ‘동원 괴담’을 줄줄이 풀어놓았다. 그 시절은 ‘동원의 시대’였고 누구나 이런 경험 한두 가지는 갖고 있기 마련이다. 어쨌든 두어 시간을 배꼽 빠지게 웃었다.

동창 모임에서 이런 얘기가 나온 것은 코미디 같은 최근의 뉴스 한 편 때문이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서울 서초구는 5일 방한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을 위한 환영 도열행사에 구청 공무원 중 3분의 1인 400여명을 동원했다.

이들은 부시 대통령이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을 출발한 오후 6시30분께부터 30여분 간 강남구 세곡동사거리 일대 도로 양 옆에 도열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부시 대통령을 환영했다. 강남구도 공무원 500여명을 환영 행사에 참석시킬 예정이었으나 부시 대통령의 이동시간이 당초 알려진 오후 4시30분에서 2시간 늦춰지자 직원들에게 강제가 아닌 자율 참여를 적극 독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나라가 5공화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싶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얼마 전에도 비슷한 촌극이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정점으로 내달리던 6월 말 이명박 정부는 전국의 읍ㆍ면ㆍ동장들을 서울에 불러 놓고 시국설명회를 열었다. 쇠고기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자리였다지만 읍ㆍ면ㆍ동장들을 모아 관제행사를 한 것은 무척이나 한심해 보였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동원은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인권 유린 행위다. 세월이 흘러 80년대의 동원 괴담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게 됐지만 당시 추억이 아름다웠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동원은 과거의 망령으로 끝나야 할 일이지 21세기에 되살릴 미덕은 아니다.

이런 어려운 얘기 다 빼고 부시 대통령이 자신이 지나간 길에 나와 열렬히 깃발을 흔들던 사람들이 동원된 서초구 직원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뉴스 보고 알았을 텐데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나라 망신 톡톡히 시킨 것이다.

이은호 정치부 차장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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