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았던 한국의 젊은이들, 마침내 <바보들의 행진> 을 시작했다. 바보들의>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유신정권을 수립하던 시기였다. 1975년 4월17일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이를 계기로 박정희는 정치탄압을 본격화하였다. 국가안전과 사회질서 수호를 명분으로 긴급조치9호를 선포하고 일체의 집회, 시위 및 정치참여를 금지시켰다. 우리 사회는 말 그대로 ‘죽은 사회’였다.
대학은 시도 때도 없이 휴강 아니면 휴교였다. 극심한 검열에 시달리던 영화계는 반공영화나 술집 호스테스, 창녀이야기 등 저질영화로 관객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하길종 감독은 영화 창작을 접고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연극 연출가 유치진 선생이 설립한 서울예술전문대(현 서울예술대)의 유덕형 학장이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영화과를 신설, 하길종 감독에게 맡긴 것이었다. 이 때 소설가 최인호가 일간스포츠에 <바보들의 행진>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대학생들의 꿈과 현실과 좌절에 관하여 에세이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별들의 고향> 이 대박을 치자 평단은 최인호를 대중인기작가라고 몰아붙였고 이에 발끈한 최인호가 시사성 있는 이야기를 하겠다며 나선 것이었다. <바보들의 행진> 은 연재 1개월만에 일간스포츠의 판매부수를 2배로 증가시켰다. 충무로의 영화사와 감독들이 최인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별들의 고향> 에서 기선을 뺏겼던 모든 영화사와 감독들이 이번에는 놓칠 수 없다고 몰려들었다. 그런데 최인호는 전작에서처럼 이 작품에도 전제를 세워놓고 있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구상할 때부터 하길종 감독과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하감독을 찾아가 그의 뜻을 전달하였다. 하감독은 이 이야기라면 다시 메가폰을 잡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어느 제작자도 ‘하길종과 바보들의 행진’을 함께 묶어 영화를 만들 용기를 갖고 있지 못했다. ‘반체제 감독과 반체제 영화’. 당시 중앙정보부는 철저하게 하길종을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고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별들의> 바보들의> 별들의> 바보들의>
충무로 반응이 싸늘하게 변해가고 있을 때, 뜻밖에 동아수출공사 이우석 사장이 최인호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섰다. <별들의 고향> 으로 최인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화천공사 박종찬 사장이 긴장하게 되었다. 정보부로부터 검열통과가 어려우리라는 언질을 이미 받았고 신문연재도 곧 중단시킨다는 정보도 입수한 상태였다. 별들의>
그러나 그는 최인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일 검열만 통과 된다면 하길종의 반정부 기질과 그의 재능으로 미뤄 작품은 대박을 칠 것임이 분명했다. 박사장은 하길종 감독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영화가 완성된 후 검열에 반려되어 필름을 불태워버려야 할 사태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감독은 이미 최인호와 시나리오 구상을 마친 상태였다. 그의 연출방향은 정말 경이로웠다. 하감독은 4ㆍ19 때 그가 몸소 겪었던 대학가의 좌절과 상실감이 현시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당연히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텅 빈 가슴을 채워줄 너무나도 절절하고 아름다운 그림과 음악이 하감독 머릿속엔 꽉 차 있었다.
박사장은 그를 만나고 돌아온 후 곧 제작에 착수했다. 하감독은 유덕형 학장에게 사유를 설명하고 대학을 떠났다. 그리고 곧 최인호와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1주일 만에 그들은 여관 문을 열고 나왔다. ‘검열패스용 시나리오’를 만든 것이었다. 하감독 머릿속에 있는 어느 것도 그 책 속에는 없었다. ‘바보같은 시나리오’는 사전검열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제작의 사전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정부는 발빠르게 <바보들의 행진> 신문연재를 중단시켰다. 제작사에 다시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나 하감독은 끄떡도 하지 않으며 특유의 멘트를 날렸다. 바보들의>
“허허... 피고들. 다 그런 거 아니갔소.”
그가 볼 때 독재에 저항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두가 죄인이었다. 당연히 너나 나나 모두 피고였다.
그는 철저한 독립영화 정신을 표방하였다. 스타급 배우를 완전히 배제하고 주인공들을 모두 신인으로, 그것도 배우 지망생이 아닌 일반 대학생들 중에서 뽑자고 하였다. 신인 배우 모집 공고문을 본 대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마침내 주인공 ‘병태’와 ‘영철’역에 1000대 1 이상의 경쟁에서 연세대 재학생 윤문섭과 서울예대 재학생 하재영이 뽑혔다. 아역연기자 출신 이영옥이 공모에 응하여 ‘영자’ 역을 따냈다. 배우의 면면이 여느 한국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전형적 배우와는 전혀 달랐다. 당시 미국의 작가주의를 우선하는 <독립영화> 형태의 제작 방식이 도입된 것이었다. 재래식 제작시스템과의 충돌은 篤?첫날부터 발생했다. 대학캠퍼스 장면이었다. 제작부에서 동원한 엑스트라를 보고 감독이 펑크를 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다른 촬영현장에 있던 내게 급히 전화가 걸려왔다. 부랴부랴 형을 찾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예술대에서 학생들을 동원하고 있는 그를 찾았다. 독립영화>
그는 제작부가 돈을 주고 동원한 엑스트라가 아저씨 아줌마들이라 직접 대학생들을 구하러 나선 것이었다. 경찰로 출연하기로 한 배우가 현장에 도착하였다. 장발이었다. 조감독이 급히 이발소로 달려가려 했다. 감독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장발 그대로 경찰모를 씌우고 경찰복을 입히라는 것이었다. 모두들 어리둥절하였다. ‘장발족 경찰’이 ‘장발족 병태와 영철’을 단속하려고 도시를 달리게 하였다. 냉소의 극치였다.
시나리오에도, 콘티에도 없는 장면들이 수없이 현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정일성 촬영감독과 신인 연기자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의 사고도 없이 촬영을 진행시켰다. 한번은 감독과 촬영감독이 소공동 거리를 몰래 카메라로 촬영을 하다가 장발 단속에 걸려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하감독은 허허대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감독은 경찰관의 어깨를 안고 외쳤다.
“피고! 다 그런 거 아니갔소.”
하감독이 터벅터벅 파출소 문을 열고 나가자 정일성감독과 스태프들이 그 뒤를 따랐다. 순경들도 태연하게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웅얼거리고 있었다.
“피고, 다 그런 거 아니갔소.”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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