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생의 작품을 즐기지 못했다. 그저 허영심이나 의무감으로 읽었다. 단편 <눈길> 을 읽었을 땐 주책없이 눈물을 쏟았지만, 그 눈물은 일본열도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는 구리 료헤이(栗良平)의 <우동 한 그릇> 을 읽고 흘린 눈물과 별다를 바 없었다. 사실 <눈길> 은 선생의 문학세계 변두리에 고명처럼 덧놓인 소품일 뿐이다. 눈길> 우동> 눈길>
선생은 젊어서부터 최인훈과 함께 한국 지식인문학을 대표했지만, 나는 선생의 지성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최인훈의 세계가 나와는 한결 더 맞았다. 두 분의 문학세계는 ‘지식인문학’이라는 헐거운 말로 뭉뚱그리기엔 너무 다르다. 두 분 다 관념을 부리는 데 능했지만, 최인훈의 관념이 근대적이라면, 선생의 관념은 고전적이었다. 묻고 되묻고 거듭 캐묻는 ‘지식인문학’의 임무 수행에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 것일까?
지성의 피륙과 청승의 속살
추리소설 형식을 즐겨 취한 것도 선생의 문학에 지성의 무늬를 아로새겼다. 그러나 선생의 문학에는 기지나 풍자나 냉소나 해학 같은 지적 장치들이 없었다. 그것들이 최인훈에게는 있었다. 발랄함과 재바름의 결여는 선생의 삶과 문학이 지녔던 진지함과 따스함의 뒷면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내 경우에) 선생의 작품에서 잔재미를 앗아갔다.
문체도 그렇다. 이성의 투명함으로 반들반들한 최인훈 문장에 견줘, 선생의 문장은 자주 어눌하고 청승맞았다. 그 청승은 어쩌면 선생이 ‘진짜’ 전라도 사람이라는 데서 나왔으리라. 고향이 서로 멀지 않았던 문학평론가 김현이나, 함경도에서 전라도를 거쳐 서울로 온 최인훈과 달리, 선생은 끝내 서울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선생의 고향 장흥은 내 선대들의 누백 년 세거지지(世居之地)였다. 내 본향이 그 곳이다. ‘제주 고씨 장흥 백파’가 내 부계 혈통의 라벨이다. 장흥은 ‘약빠른 서울내기’인 나와 전라도 사람이었던 선생을 이어주는 거의 유일한 고리다.
내가 선생의 작품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은 선생의 문학이 예사로웠다는 뜻이 아니다. 취향과 품질을 분별할 정도의 판단력은 내게도 있다. 읽기의 편식이 심해 극히 주관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해방 뒤 소설가 가운데 셋만 꼽으란다면, 나는 주저없이 선생과 최인훈, 이인성을 꼽겠다. 그것은 한국문학이 지난주 대상(大喪)을 당했다는 뜻이다.
나는 생전의 선생과 친분이랄 만한 게 거의 없었다. 먼발치에서 뵌 것까지 셈해도, 여남은 번이나 뵈었을까? 그러나 내겐 거의 스무 해 전 선생께 받은 편지가 하나 있다. 선생의 어떤 작품을 읽고 반해 신문에 호들갑스러운 서평을 썼는데, 거기 고마움을 표한 편지다.
몇 년 전, 그 알량한 친분마저 금이 갔다. ‘전라도’ 발언(본인은 이를 부인한다)으로 한창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소설가 이문열씨가 민주당 추미애 의원과 사나운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 때 선생은 한 신문 칼럼에서 이문열씨를 두둔했다. ‘전라도’가 정체성의 큰 부분인 나는 이문열씨를 비판하는 칼럼 끝머리에서 거칠게 선생을 거론하고야 말았다. “이청준씨께 묻는다. 문인까지 갈 것도 없이 한 시민의 처지에서, 이문열씨의 발언은 받아들일 만한가? 아니 전라도 사람으로서, 이문열씨의 발언은 받아들일 만한가?”라고.
해방 이후 한국문학의 大喪
그 뒤, 선생은 나를 볼 때마다 외면하셨다. 나도, 겸연쩍음과 오기가 겹쳐, 선생을 피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뵌 것이 두 해 전 어느 상가(喪家)에서였는데, 우연히 선생과 등을 맞대고 앉게 된 나는 일어설 때 인사도 없이 그 곳을 나왔다. 이따금 그 칼럼을 되새기며, 내가 옳았는지 글렀는지 곰곰 생각해보곤 한다. 모르겠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처신할 것 같다. 지난주, <눈길> 이후 처음으로 선생님 때문에 울었다. 선생님이 저쪽 세상에서 늘 평안하시길 빈다. 눈길>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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