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업화 초기에 '공순이' '공돌이'라 불렸던 공장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선교회가 있다. 1958년 당시 최대 공업지역이었던 서울 영등포에 선교의 첫걸음을 내디뎠던 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영등포산업선교회(총무 신승원 목사)다. 70, 80년대 산업현장에서 인권 지킴이 역할을 했던 이 선교회가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아 생명ㆍ평화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도라면 구체적 삶의 조건을 변화시켜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산업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일 당산동6가 선교회 사무실에서 만난 신승원 목사는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역사는 지난했던 한국 산업화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고 말했다.
과거 공장으로 빽빽했던 선교회 주변은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바뀌었고, 선교회의 역할도 축소된 듯하지만 노동운동사와 개신교 선교사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개발독재가 본격화하던 60년대 말 공장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일당 60~70원의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한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초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던 선교회는 이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보고 삶의 질과 인권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선교의 방향을 바꿨다.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교육을 했고, 사회단체들과 연대해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힘썼다. 원풍모방, 남영나일론, 대일화학, 롯데제과 등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곳의 여성노동자들은 모두 이 선교회의 교육ㆍ문화 프로그램을 거쳤다.
그러다보니 '도산(도시산업선교)이 들어가면 도산당한다'는 악의적인 비난도 받았다. 당시 선교회가 만든 교육ㆍ문화 등 노동자들의 소모임이 100~150개나 됐고 한 달 평균 4,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선교회를 방문했다고 한다. 선교회는 77년 성문밖교회를 개척했다.
70, 80년대 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해 노동운동을 탄압했고, 선교회를 이끌던 목회자와 실무자들이 숱하게 구속, 구류, 폭행을 당했다. 이런 역경은 6ㆍ10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질 때까지 계속됐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이 본격화하면서 산하 노동단체들이 빠져나가고, 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선교회는 노동자 뿐만 아니라 지역민, 노숙인과 함께 하는 기독교 선교공동체로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됐다.
외환위기 이후 노숙인들을 위해 햇살보금자리운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고, 60년대에 장시간 노동으로 은행에 갈 시간조차 없었던 노동자들을 위해 시작한 신용협동운동도 지금까지 이어져 조합원이 여전히 400여명이나 된다. 한방ㆍ치과 등 의료 지원을 하는 서울의료협동조합운동에 지역의 1,000여 가구가 가입해 있다.
2001년부터는 동남아의 사회복지선교 활동가들을 훈련하는 국제 디아코니아 훈련원을 개소, 지금까지 70여명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선교회는 노동선교로 출발했기 때문에 아직도 중심활동은 노동선교이며, 요즘은 비정규직을 지원하는 활동이 그 중심이다.
선교회의 50년 역사를 신 목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단순히 사람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에 비춰보면 요즘 성장제일주의에 함몰된 한국교회가 오히려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선교회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5월에 지난 10년간의 활동을 평가하는 역사세미나를, 6월에는 걷기대회를 가졌다. 10월 25일에는 50년 역사를 극화한 노래극 공연, 여성노동자 2명의 삶을 통해 선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다큐멘터리 상영, 1,958명의 후원인과 함께 하는 후원행사 등으로 이뤄진 '희년 문화제'를 연다.
또 11월 9일에는 기념예배와 역사자료집 발간, 민주화운동 기념 현장 표지석 제막 등의 '50주년 희년대회'를 갖는다.
선교회는 향후 50년은 지역과의 협동, 아시아와 연대하는 방향으로 지평을 확장하면서 생명ㆍ평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시대의 산업선교를 모색하고 있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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