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다니던 신문사에서, 나는 부장이 바뀔 때마다 사표를 내던지곤 했다. 새 부장과 손발을 맞추려면 꼭 그런 푸닥거리가 필요했다. 반려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낸 게 절대 아니었다.
그 때마다 진심으로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1990년 여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문화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새 부장이 내 기사에 자꾸 손을 댔다.
웬만하면 그대로 출고하시라고 몇 번 항의하다가, 부장이 '데스크의 권한'이라는 걸 엄중히 내세우기에, 그 권한 가지고 평생 잘 사시라며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 사표가 수리됐다면, 8년차 기자로 내 직장 생활이 막을 내렸을 게다.
눈물의 생리학은 격한 감정서 비롯
그 날 저녁, 같은 부서 여자 동료 하나가 합정동 내 집으로 찾아왔다.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함께 마시며, 그녀는 나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계속 눈물을 짜면서. 나 없인 자기도 회사 다닐 마음이 없다는 거였다. 꼭 그 눈물에 설득당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직장 동료들의 잇단 '가정방문'을 못 이긴 체하며 일주일 뒤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 눈물을 질질 짜던 동료가, 나 없인 자기도 회사 다닐 마음이 없다던 그 동료가, 한 동안 나를 차갑게 대하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 "너 요새 왜 나한테 찬바람 날리니?"라고 물었다.
자기는 내가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회사를 그만둘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와 실망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눈물녀'와 나는 이내 그전처럼 친하게 붙어 다녔다.
눈물의 생리학은 복잡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감정의 격한 상태와 관련 있으리라는 상식은 누구에게나 있다. 슬프거나 원통할 때, 우리는 눈물을 머금거나 짓거나 글썽거리거나 쏟거나 질질 짠다.
그 슬픔이나 원통함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피눈물을 흘린다. ('피눈물'은 대개 비유다. '피눈물'에 실제로 피가 섞여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울다 울다 눈이 짓물러 핏줄이 터져나가, 눈물에 실제로 피가 섞이는 일도 있을 테다.) 슬픈 이야기는, 픽션이든 실제든, 우리를 눈물범벅으로 만들고, 우리 얼굴에 눈물자국을 남긴다.
사내들은 대개 어려서부터, 눈물을 참아야 한다고 부모에게 교육받는다. 헤픈 눈물은 유약함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슬프거나 분한 일을 당해도, 눈물을 삼키거나 얼른 닦아냄으로써 거둬들인다. 꾹꾹 참으며 마음으로만 흘리는 이런 눈물을 '속눈물'이라 부를 수 있을 테다.
눈물은 슬플 때만 나오는 게 아니다. 너무 기쁜 일이 생겼을 때도, 눈물은 고이거나 핑 돌거나 샘솟거나 볼을 적시며 흘러내리거나 비 오듯 하거나 앞을 가린다.
눈물은 흔히 이슬에 비유된다. 신파조로 떠벌리자면, "내 사랑 줄리엣이여, 그대 눈에 이슬이 맺혀 복숭아빛 뺨으로 주르르 흘러내리는구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비유에서 눈물이 이슬로부터 취하고 있는 것은 '깨끗함'의 이미지일 테다. 눈물은, 때로, 그저 '뜨거운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로미오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는 식으로.
한국 한시(漢詩)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속할 정지상의 <송인(送人)> 에서, 눈물은 석별의 눈물, 슬픔의 눈물이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고등학교를 마친 한국인은 이 시를 대충이라도 해석할 수 있을 테다. 송인(送人)>
이를테면 "비 갠 긴 둑에 풀빛 진한데/ 남포에서 그대를 보내니 노랫가락 구슬퍼라/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 것인가?/ 해마다 이별 눈물을 푸른 물결에 보태거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석별의 눈물이 있는가 하면, 감격의 눈물도 있다.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에서 주인공 네모리노가 부르는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 (Una Furtiva Lagrima)은, 그 구슬픈 단조 가락에도 불구하고, 감격의 눈물이다. 남몰래> 사랑의>
여주인공 아디나의 눈에 액체를 만들어낸 것이 네모리노의 순정이니 말이다. 그 눈물은 거의 이뤄지지 못할 뻔한 두 사람의 사랑에 (재)시동을 건 눈물이다.
감격의 눈물조차도 슬픔이 깔려
삼성특검으로 유명해진 미국인 팝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도 그런 눈물이리라. 그런 감정의 격함 없이 나오는 눈물도 있다. 사실 이게 가장 고약한 눈물이다. 최루탄이 흩날릴 때 흘리는 눈물 말이다. 40대 이상의 한국인치고 이 눈물 한두 번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테다. 행복한>
그러나 가장 전형적인 눈물은 슬픔의 눈물, 고통의 눈물이다. 이 눈물의 일상 생리학은, 겉보기엔 호사스레 사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남모르는 괴로움이 있다는 뜻의 속담 "비단옷 속에 눈물이 괸다"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연애라는 뜻의 泳好【?? 눈물은 기쁨이나 감격보다 슬픔을 뜻하기 십상이다. <남 몰래 흐르는 눈물> 조차도, 감격 속에 슬픔을 감추고 있다. 거기서 네모리노가 노래하는 것은 확신이라기보다 불안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남>
수많은 대중가요가 사랑을 노래해 왔고, 그 사랑노래들은 가사에 '눈물'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눈물들 역시 대체로 슬픔의 눈물, 석별의 눈물, 좌절의 눈물이다.
가수 나훈아씨가 60년대에 부른 노래 가운데 <사랑은 눈물의 씨앗> 이라는 게 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먼 훗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서로가 헤어지면 모두가 괴로워서 울 테니까요." 그 당시의 문화적 지평을 감안해도 너무 단순한 선율에 유치한 가사였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이 노래에 열광했고, 눈물을 이별의 슬픔과 포갰다. 사랑은>
80년대에 김세화씨가 부른 <눈물로 쓴 편지> 에서는 선율과 가사가 한결 나아졌다. "눈물로 쓴 편지는/ 읽을 수가 없어요/ 눈물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눈물로 쓴 편지는/ 고칠 수가 없어요/ 눈물은 지우지/ 못하니까요// 눈물로 쓴 편지는/ 부칠 수도 없어요/ 눈물은 너무나/ 빨리 말라 버리죠/ 눈물로 쓴 편지는/ 버릴 수가 없어요/ 눈물은 내 마음/ 같으니까요" 이 노래에서도 눈물은 슬픔의 기호다. 눈물로>
서양 대중가요에서도 마찬가지다. 아프로디테스 차일드가 부른 <빗물과 눈물> (Rain and Tears)은 "빗물과 눈물은 같은 거지만/ 햇빛 아래선/ 눈물을 빗물인 척 속이기 어렵죠"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도 눈물은 미완의 사랑과 이어져 있다. 빗물과>
텍사스 출신의 멕시코계 미국인 가수 프레디 펜더가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서 부른 <그 다음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Before the next teardrop falls)에서도 눈물은 슬픔이다. 이 노래의 화자는 제가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양보한다. 그>
그러나 혹시라도 그 남자가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해 그녀의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 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그녀 옆으로 달려가겠노라고 한다. 비록 그녀의 처음 사랑을 얻진 못했지만, 아쉬울 때 부르면 즉시 달려가,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고, 그 빌어먹을 놈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참 애절한 사랑이다.
자기연민의 눈물은 보이기엔…
삼각관계를 그린 한국 드라마들에서도, 사랑하는 여자(A라 하자)를 친구에게 양보한 사내가 그 친구에게 "A 눈에서 눈물 나오게 하면 알지?"라며 대범한 사랑을 뽐내는 장면이 더러 비친다.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대사는 여자의 오빠나 아버지의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아름다운 눈을 흔히 보석에 비유하는 관행에 기대면, 눈물은 액화한 보석, 액체보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보석을 너무 헤프게 흘려서는 안 될 것 같다.
사실 사랑이 낳은 눈물이든, 삶의 고단함이 낳은 눈물이든, 그 눈물은 저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상에서 추한 것 하나가 바로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다. 자기연민의 눈물, (엄살스러운) 설움의 눈물 말이다.
얼굴도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병자들이나 빈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야 어차피 쉽지 않겠지만, 가족, 친구, 동료, 이웃, 공동체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려보자. 결식아동들을 위해, 이주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장애인들을 위해, 병자들을 위해,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보자.
그 눈물이야말로 진짜배기 '사랑의 눈물'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 내 문화부 동료가 내 앞에서 흘린 눈물은 자기를 위한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위한 눈물이었을까? 만나면 한 번 물어봐야겠군.
객원논설위원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