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갤러리와 미술관 소개부터 하자. 미국 뉴욕의 로버트 밀러 갤러리. 루이즈 부르주아, 장 미셸 바스키아, 에바 헤세, 야요이 쿠사마 등 이름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일 세계 미술계의 거장들이 거쳐간 세계 10대 화랑 중 하나. 유명 화랑 하면 가장 먼저 그 이름이 떠오르는 가고시안 갤러리나 페이스 갤러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곳이다.
코네디컷의 얼드리치 현대 미술관은 어떤가. 생존 작가만이 입성할 수 있는 이곳은 규모는 다소 작지만 뉴욕의 구겐하임이나 휘트니 미술관 못잖은 1등급 미술관으로, 안젤름 키퍼와 솔 르윗 같은 거장들이 전시를 열었다.
일본 도쿄의 모리 미술관도 만만찮다. 롯본기 한복판의 고층건물 52, 53층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의 이 대표적인 현대미술관 역시 빌 비올라, 장 피에르 레이노 등 세계적 작가들을 품었던 곳이다.
미술가들의 야심을 자극하는 이 세 곳에서 잇따라 개인전을 여는 한국 작가가 있다. 한지를 이용해 독특한 질감과 공간개념을 선보여온 전광영(64).
그는 올 9월 4일~10월 11일 로버트 밀러 갤러리에서, 12월 14일부터 내년 5월 25일까지 얼드리치 현대 미술관에서, 2월 14일~3월 15일 모리미술관에서 연달아 초대전을 갖는다.
경기 용인의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아직도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다”며 흥분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내 인생을 걸고 도박한다는 각오”라고도 했다.
삼각과 사각의 스티로폼을 한문 고서의 한지로 싼 뒤 화면에 쌓아올리는 그의 ‘집합(Aggregation)’ 시리즈는 지독한 장인정신을 요하는 수공업적 작업으로 ‘악명’ 높다.
100호짜리 작품에 7,000여개의 한지조각이 들어가고, 스티로폼을 한지로 싸는 데 최소 2만번의 손길이 간다. 어릴 적 강원 홍천의 가계에서 운영했던 한약방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한지에 싼 약재가 힌트가 됐다.
작은 개체들이 때로는 평면으로, 때로는 굴면으로 결합하면서 만들어지는 돌담 같기도 하고, 우주의 운석 같기도 한 표면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평면과 입체의 벽을 깬 독특하고 사려 깊은 작업으로 그를 무명의 오랜 어둠에서 구원했다.
다가오는 전시에는 기존의 모노톤 작업 외에 과감하게 색감을 도입한 신작들도 선보인다. 쩍쩍 갈라진 대지 혹은 혹성의 표면처럼 보이는 어두운 배경에 파란 염료로 물들인 한지를 사용해 푸른 분화구를 파냈다.
“현실은 황폐하고 어둡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자는 의미에서 새롭게 시도해봤죠. 뉴욕 같은 곳에서 5분 스타가 안 되려면 1~2년새 꾸준히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야 합니다. 시장 반응이 아무리 좋아도 10년, 20년 똑같은 작품만 하는 작가는 절대 오래 살아날 수 없어요.”
그런 절박한 도전 정신은 새로운 입체 작품들도 낳았다. 우리를 조소하고 질타하듯 삐딱하게 기울어진 채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거대한 두상, 숯검댕이처럼 검게 탄 병든 심장을 표현한 입체 작품이 처음으로 전시에 나온다.
홍익대 미대와 미국 필라델피아 대학원을 졸업한 버젓한 이력의 그이지만, 40대 초반까지 그는 불우한 무명에 지나지 않았다. 화단에서도, 시장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집합’ 시리즈가 90년대 중반 세계 5대 아트페어에 연속 출품되면서 해외에서 먼저 유명해졌다.
“혼자 뛰어다니면서 외로울 때가 많았어요. 블루칩 작가는 찾아도 작품이 좋은 작가는 찾지 않으니 미술계에 들어온 게 잘못된 선택처럼 느껴졌죠. 하지만 해답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죽도록 작품을 하자.”
그가 죽도록 만들어 붙인 다각형의 한지 조각들엔 그 고서를 돌려 읽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문과 숨결, 사연이 묻어 있다. 때로는 고요한 호수 같은, 때로는 격랑의 바다 같은 그의 아름다운 화면은 그 사연들이 충돌하고 결합한 우주적 결과다.
용인=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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