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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31> 유현목 감독·배우 김진규는 나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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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31> 유현목 감독·배우 김진규는 나의 스승

입력
2008.08.0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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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때 유감독 자택 찾아가자 "성인돼서 만나자" 격려데뷔 10년후 '불꽃' 함께 작업…1975년 대종상 휩쓸어

그분들의 이름이 나의 머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것은 까까머리 중학교 3학년 때다. 4.19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였다. 학교는 시도 때도 없이 교문을 걸어 잠갔다. 우리는 아예 교모를 가방에 쑤셔 넣고 학교 근처에 있는<낙원극장> 과 <우미관> 에서 죽치며 동시상영 영화를 보는 게 일과였다.

<초원의 빛> <밤이 울고 있다> 등의 ‘나탈리 우드’와 ‘웨렌 비티’ ‘로버트 와그너’에 푹 빠져서... 그러던 어느 주말, 형이 ‘괜찮은 한국영화’라며 동네에 있는 <동양극장> 에 나를 데리고 갔다.

그 극장은 한국영화를 재개봉하는 ‘장사 안 되는 극장’이었다. 학생이 들어갈 수 없는 영화였다. 커다란 잠바를 푹 뒤집어쓰고 형 뒤를 따랐다. 형은 표를 한 장만 끊고 기도아저씨에게 ‘내 동생’이라고 귓속말을 했다. 형은 이 극장 단골이었다. 기도아저씨가 슬쩍 외면해주었다.

<오발탄> . 아니, 오발탄이 아니었다. 이 영화는 13세 소년의 머리를 정조준하여 충격적인 실탄을 난사하고 말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그 자리에 멍하게 앉아있었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지쳐 어디론가 “가자”며 중얼거리던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이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이범선 원작소설을 사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극장을 찾았다. 그러나 간판이 내려지고 없었다. 정부가 상영을 중지시킨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났다. <오발탄> 이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마지못해 정부가 다시 상영을 허가했다. 보고 또 보았다. 고교생으로 성장한 나에게 <오발탄> 은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의 집을 찾느라, 전화번호를 아느라 백방으로 뒤졌다. 마침내 대강의 동네를 알아냈다. 마포에 있는 아파트였다.

비오는 일요일 아침, 동호수를 찾느라 흠뻑 비에 젖은 채였다. 아파트의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 후, 한 여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유현목감독님을 뵙고 싶습니다” “어디서 왔어요?”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서 감독님을 찾아 왔습니다” “주무시는데 어쩌나... 다음에 약속을 하고 오면 좋을텐데...” 그 분은 수건을 들고 나와 젖은 교복을 닦게 해 주었다.

유감독님의 부인이신 화가 박근자 여사였다. 그 분은 약속대로 유감독님과 면담기회를 마련하여 주셨다. 유감독님은 ‘영화감독은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며 ‘우선 학업에 열중하고 성인이 된 후 다시 만나자’고 나의 등을 두드려 돌려보냈다.

주인공인 김진규 선생님의 실제 모습이 보고 싶었다. 수소문을 하였다. 집에서 가까운 충정로에 살고 계셨다. 큰 한옥이었다. 대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등하교 때 그 집 앞을 지나며 대문이 열려있나, 고개를 내밀어 보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가끔 대문이 열리기도 했으나 다시 바로 닫혔다. 수없이 그 집 앞을 지나다녔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발탄> . 아마도 이 한편의 영화. 이 두 분이 나를 평생 ‘영화의 길’로 인도하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지 10년이 되던 1975년. 마침내 이 두 분을 만나게 된다. 그 것도 영화현장에서. 남아영화사로부터 시나리오를 받았다. <불꽃> . 대종상 수상이 틀림없는 대작이라며 영화사 제작부장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5작품 겹치기 출연계약을 놓고 매니저가 머리를 앓고 있을 때였다.

그 때 내 눈이 책 표지 한 곳에 꽂혔다. ‘대종상’이니 ‘대작’이니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현목 감독 작품> 이라고 표지에 쓰여 있었다. 나는 책도 읽지도 않고 ‘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매니저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머리를 박박 깎아야 하는데요.”

중학생 시절부터 성인까지 역할이기 때문에 삭발을 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다른 영화와 겹치기 출연은 불가능해졌다. 나는 주춤하였다.

“시간을 주세요. 책을 읽겠습니다.”

결론은 반드시 머리를 삭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의논을 하였다. 삭발할 경우 1년 정도는 가발을 쓰지 않는 한 타 영화를 출연하지 못하고 쉬어야 한다. 아내는 두 말 할 것 없이 해야 한다고 했다. 경제적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유현목 감독 작품> 이기 때문이었다.

이어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김진규 선생님> 이 합류하였다는 것이다. 김진규 선생님이 유감독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든 스케줄을 젖히고 출연 승낙을 하셨다는 것이다. 한 순간에 나의 신화적 존재인 두 분을 모시고 작품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촬영이 시작하기 전, 두 분을 찾아 뵙고 나의 소년시절에 꿈꿨던 일들이 지금 실현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두 분은 매우 기뻐하셨다. 그리고 수뮌?연기자와 스태프 속에서 나에게 각별한 사랑을 주셨다. 영화는 한 소년이 일제시대부터 6.25 전쟁까지 회오리 같은 한민족사에 휘말리는, 말 그대로 대작이었다. 촬영은 6개월간 전국의 깊은 산과 강, 바다를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위험한 전투장면이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치러졌다. 유감독님의 콘티는 완벽했다.

정일성 촬영감독과 차정남 조명감독의 호흡이 숨가쁘게 돌아갔다. 다른 현장에서 느낄 수없는 희열을 만끽할 수 있었다. 김진규 선생님은 쉬지 않고 작품분석과 역할분석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셨다. 김석훈, 고은아, 강민호, 윤소라... 평소 존경하고 좋아하는 한국의 최고의 배우들과 스태프 모두가 나를 지치지 않게 지켜주었다.

위험한 고비를 수 없이 넘기고 마침내 촬영을 마쳤다. 필름이 편집실에 넘겨졌다. 마지막 편집 날이었다. 유감독님이 나를 불렀다. 마지막 컷의 스톱모션에 대한 의견을 구하였다. 몇 가지 중 나의 의견을 선택하셨다. 나는 날아갈 듯 기뻤다. 그해 <유현목 감독 작품-불꽃> 은 대종상 최우수작품상과 남우주연상등 4개 부문을 휩쓸며 1975년 최고의 영화가 되었다. 시상식장에서 나의 수상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유 감독님과 김진규 선생님이셨다.

두 분은 자신들의 영화에 대한 꿈을 나에게 돌려주신 것이다. 까까머리의 내가 아내에게 트로피를 안겨주며 물었다.

“소년하고 사는 재미 어때...?! ”

꿈꾸는 영화소년. 유현목감독님. 유명을 달리하였으나 살아있는 배우 김진규선생님.

당신들이 있기에 한국영화는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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