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오후 5시20분,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의 허름한 3층 건물 지하층으로 서울 경복고 생물 교사 임영선(40.여)씨가 들어선다. 미혼모 생활시설인 애란원이 자리잡은 이 건물 지하층에는 애란원에 몸을 의탁한 10대 미혼모 10여명의 공부방이 있다. 임씨가 한 방문을 열자, 한 10대 소녀가 반갑게 맞이한다.
임씨는 지난해 초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이곳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미혼모에게 개인 교습을 하고 있다. 이날 임씨를 맞이한 A양과는 3개월 전부터 함께 하고 있다.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미혼모들의 특별한 사정 때문에 한 선생님이 여러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직 일대일 교습만 이뤄지며, 학습과 무관한 사적인 얘기는 서로 주고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서로 사적인 농담을 나눌 수는 없지만, 임씨를 바라보는 A양 눈빛에는 믿음이 가득하다. 헐렁한 옷차림 위로 드러난 불룩한 배 윤곽으로 미뤄볼 때 임신 7개월은 족히 넘었을 텐데도 A양은 힘든 기색 없이 공부에 열중한다. 올 겨울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려면 공부를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미혼모 제자의 열의에 못지않게 임씨도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전공인 생물 외에, 국어, 영어, 수학까지 가르치려면 미리 공부를 해야 한다. 임씨는 “매주 금요일 2시간 수업을 위해, 핵심개념만 담은 CD와 학습자료를 만들어 연습을 하는 등 나름대로 꼼꼼히 준비를 한다”고 말했다.
임씨가 한국장로교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애란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7년 초. 2006년 중국 상하이 한국국제학교에 초빙 교사로 파견돼 탈북 청소년의 어려운 삶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귀국한 뒤 불우 청소년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찾던 중 평소 다니던 ‘높은뜻 숭의 교회’를 통해 애란원 학습봉사를 소개 받았다. 당시 애란원에서는 이미 10여명이 개인교습 봉사를 하고 있었다.
학습 봉사만 하던 임씨는 최근 봉사의 폭을 넓혔다. 지난 5월부터 주말을 이용해 미혼모 아이를 직접 돌보는 일도 시작한 것이다. 임씨는 “올해 초 애란원에 일찍 도착해서 학생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미혼모가 아이를 안고 어디에다 맡겨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걸 보고 안타까웠다”며 “이후 아기들도 돌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애란원 사회복지사인 유은성씨는 “어려운 여건인데도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고 미혼모의 장래를 걱정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 진심 어린 봉사의 깊이가 느껴진다”고 칭찬했다.
임씨는 “공부를 열심히 하던 학생이 가족의 반대와 경제적 궁핍 때문에 공부를 그만둘 수밖에 없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봉사활동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는 남편과 아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임씨는 “동료 교사인 남편과 초등학생 아들이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엄마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라’고 말하는 게 고맙기는 하지만,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임씨는 앞으로 봉사 활동의 영역을 더욱 넓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낙태가 만연한 시대에 미혼모의 길을 선택하는 것도 큰 용기입니다. 이들이 숨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윤재웅 기자 juy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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