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글로버 지음ㆍ김선욱 등 옮김/문예출판사 발행ㆍ648쪽ㆍ3만원
국내에도 성공적으로 상륙한 캐나다의 공연단 ‘태양의 서커스‘가 지금 세계 유흥 도시의 고급 호텔에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공연물 중에 <주매니티> 라는 성인물이 있다. 동물원(zoo)과 인간성(humanity)을 합쳐 만든 말로, 인간 속에 잠재한 갖가지 본능을 쇼의 형식을 빌어 시각화 한 무대다. 야수성, 색욕, 호전성 등을 라스베이거스 쇼처럼 풀어 보인다. 도덕과 윤리는 웃음거리가 된다. 주매니티>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지난 세기 서구 문명을 윤리의 잣대로 조명한다. 철학자 칸트가 말했던 바, “내 머리 위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라 했던 명제의 안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 대전의 살육,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문화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걸프전 등 대살육의 현장속으로 걸어가는 일이다. 보다 평화롭고 인도적인 세계에 대한 계몽주의적 희망을 찾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책은 하드 고어 영화의 상상력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문의 기록이다. “담벼락에 귀가 못질 당한 채 밤을 지샌 뒤 교수형을 당하고, 단검으로 자궁이 찢겨 태아가 끄집어내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을 만든 신에게 물어볼 질문들”(57쪽)을 던진다.
프랑스 혁명은 루이 14세를 단두대의 제물로 바쳤다. 일단 잔인성의 충동질을 받은 사람들은 “그 피에 손가락을 찍어 보기도, 맛을 보기도”(61쪽)했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현대의 잔인성에 비하면 약소하다. “잔인성의 축제는 오늘날 최고조에 달했다”고 책은 단언한다. 최근 중동의 예를 보자.
두바이의 정치범 감옥에 고문실을 만든 영국 회사는 그 방을 ‘즐거움의 집’이라 했고, 고문자들은 아무런 가책을 받지 않았다. 고문 받고 죽은 이들을 던져 넣는 황산 탱크는 ‘수영장’이다. 그들은 “라디오나 TV에 의해 생각이 끊임없이 분산돼 있었다”며 “섹스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유머가 없었다”는 것이다.
책은 그를 두고 “우리는 가볍게 즐기지만 너희는 지옥을 경험한다는 메시지의 표출”이라며 “권력의 전시”라고 규정한다. 현대의 대량 살상전을 치른 병사들은 “집단으로 하는 살상은 흥분되는 일이며 심지어 즐거운 일”이라며 “그것을 사랑했다”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책은 이 시대에 던지는 심리학적ㆍ윤리학적 질문이다. 행위의 도덕성과 참혹한 결과 사이의 문제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사례를 통해 탐구된다. 책이 주목하는 것은 특히 원거리 대량 살상전의 경우, 책임이 파편화되면서 결국 소멸하기까지의 메커니즘이다.
동시에 후방에서는 민족ㆍ종족적 감정이 격앙되고 부정확한 뉴스탓에 증오의 메커니즘이 확대 재생산된다. 미소간 핵전쟁 발발 바로 앞에서 멈춘 1962년 쿠바 사태, 캄보디아 사태 등 현대의 예를 통해 정책과 커뮤니케이션의 명확함, 군대의 표류를 제어할 메커니즘을 강조한다.
책은 서양 문명을 근저에서부터 뒤집은 나치즘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종족주의, 왜곡된 수치감, 니체 철학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만든 국가사회주의를 본질로 하는 나치즘은 희생자들을 철저히 능멸하는 데 탁월한 자질을 발휘했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격화, 굴욕적 농담(처형을 ‘추수 축제’로 표현하는 등) 등 다양한 차원에서 나치즘을 분석한다.
동시에 ‘위대한 독일 철학의 시대’를 구현한 것으로 당대에 칭송 받은 하이데거를 정당한 평가의 도마에 올린다. “인간 하이데거를 버리고 철학자 하이데거만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할까?”(581쪽)라는 질문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낙관주의가 과연 이 시대에도 용인될 수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을 자식들에게 바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재앙에 맞선 인간애와 용기만이 온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장병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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