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40여년 뒤인 2050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 공산당이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 동부연해와 내륙간의 불균형과 환경파괴, 에너지 등의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번 장정여행은 이 문제들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게 해줬다. 중국의 환경문제는 심각하다. 가는 곳마다 도로 공사 등으로 자연생태계가 여지없이 깨지고 있었다. 오지에도 제대로 된 강들이 남아있지 않았고, 차들이 내뿜는 매연과 밥을 하기 위해 때는 나무나 석탄의 연기 등으로 숨 쉬기조차 힘든 곳이 많았다. 생활 쓰레기들이 사방에 버려져 있었다.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싼시(陝西)성에서 석유가 발견돼 채취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경유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모습도 보았다.
상하이(上海)의 와이탄(外灘)도 주중에는 조명을 끄는 등 많은 지역에서 정전을 경험해야 했다. 중국이 지금처럼 빠른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리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심각하다.
빈부격차는 더욱 큰 문제다. 빈부격차를 측정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니계수’라는 것이 있다. 계수가 1이면 완전 불평등, 0이면 완전평등 식으로 숫자가 클수록 불평등하다.자본주의 선진국 중 가장 빈부격차가 적은 스웨덴의 지니계수는 0.211이고 가장 심한 미국이 0.368수준이다.
우리의 경우는 군사독재시절 0.310수준으로 높았던 지니계수가 민주화이후 낮아져 1997년 경제위기 전에는 0.283을 기록했다가 경제위기후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하자 0.358까지 높아졌다.
중국은 0.2이었던 지니계수가 개혁개방이후 높아지기 시작해 1981년 0.3, 2000년 0.417를 기록했다. 최근 중국사회과학연구원은 2005년 기준으로 무려 0.496을 기록했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빈부격차가 어느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더 심각하다는 얘기다.
장정여행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지를 주로 지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낙후한 중국의 농촌의 실상을 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농민들의 삶은 도시의 화려한 소비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보니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빠져나가고 있다.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을 막는 규제정책에 따라 사실상 불법으로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 농민공(農民工)들은 이런 신분 때문에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을 감내해야 한다.
이 점에서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 동부 연해와 내륙지역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겠다는 후진타오(胡錦濤)의 ‘화해 사회론’(일종의 조화사회론)은 시의적절하다. 그러나 문제는 화해사회론이 시장경제가 전면화하면서 날로 심해지고 있는 불평등을 현실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냐는 점이다.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이 뿐이 아니다. 티베트사태는 중국이 안고 있는 두 개의 아킬레스건을 보여주었다. 민족문제와 민주주의이다. 소수민족은 2000년 기준으로 중국의 인구의 8.4%인 1억600만명 수준이지만 전체국토의 63.7%를 차지하고 있다.
분명 티베트는 다른 소수민족과 다른 측면이 많지만 그렇다 해도 티베트문제는 중국의 심각한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티베트인들의 자치요구에 대한 중국정부의 대응은 민주주의와 관련해 중국이 안고있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물론 13억 인구가 서구식 선거와 민주주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생각해 볼 문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확대하지 않고 일류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얼마 전 중국 공산당의 싱크탱크는 정치체제 개혁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공산당 권력을 점차 제한하고 중국의 의회 격인 전인대와 언론계, 종교계, 시민사회의 권한을 확대하고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3단계에 걸쳐 정치개혁을 추진, 2040년까지 민주와 법치가 발전한 현대화 국가건설을 완성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규범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경제 자유화 속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계속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할 일일 것이다.
날로 심화하는 불평등, 민족 문제, 민주주의 등 21세기 중국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정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농민들을 수천 년의 압제와 수탈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던 장정의 정신이 지금 중국에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70년 전의 장정정신에 기초해 화해사회로 나가는 ‘21세기 신(新)장정’이다.
■ 장정 이후 중국현대사 / 문화혁명의 광기 지고 중국식 개혁개방 가속
중국 공산당은 시안(西安)사변으로 회생의 기회를 맞고 항일투쟁에서 기반을 확대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 2차국공합작은 깨지고 홍군과 국민당군은 내전에 들어간다. 여기서 홍군이 승리,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했다.
50년 한국전쟁이 터진 뒤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미군이 반격이 시작되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국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경우 중국은 참전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보냈으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북진한다.
이에 마오는 한국전에 홍군을 파견했고 참전한 맏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50년대 말 마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한다.
장정의 뿌리가 된 농민들을 인민공사라는 집단농장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소련식의 농ㆍ공 분리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마을마다 뒷마당 제철소를 만들어 농기구들을 직접 만들게 했다. 이는 경제적으로 문제가 많은 정책으로서 사방에 굶주린 농민들이 속출했다. 최소한 2,0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59년 루산(盧山)에서 당 지도부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고향 창사(長沙)의 농촌사정을 전하면서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 화가 난 마오는 "여러분들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 농민들로 홍군을 만들어 여러분과 싸우겠다"고 협박했다.
펑더화이는 국방장관에서 쫓겨났으나 마오 역시 국가주석자리를 류샤오치(劉少奇)에게 물려줘야 했다. 류샤오치는 덩샤오핑(鄧小平) 등과 함께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인민공사에서 임대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줬다.
경제가 회복되자 마오는 문화대혁명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당과 베이징(北京)이 자본주의에 물든 주자파(走資派)들로 가득 차있다"며 젊은 대학생들이 홍위병이 되어 당ㆍ군을 공격하고 나섰다.
마오의 처 장칭(江靑) 등 4인방이 주도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주자파로 몰려 쫓겨났다. 류사오치와 펑더화이는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낡은 자본주의의 유제들을 없앤다는 이름아래 전통문화들을 파괴하고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하방시켰다. 76년 마오가 죽자 군ㆍ당의 원로들이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을 체포함으로써 광기는 끝을 맺는다.
이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를 향한 개혁개방을 추구해 나갔다.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농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줬다. 동부 해안지역에 경제특구를 만들어 수출을 위한 공업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89년 정치사회적 개혁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텐안먼(天安門) 광장의 학생시위가 발생하자 이를 유혈 진압했다. 경제개혁과 정치적 억압이 결합한 중국형 개혁모델이 자리 잡았다.
덩의 지도아래 중국은 빠르게 경제발전을 이뤘고 후계자인 장쩌민(江澤民) 하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그러나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는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4년 권력을 장악한 후진타오는 화해사회론을 내걸어 분배 문제의 해결에도 노력하고 있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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