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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의 Who's Now] 원로 여배우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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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의 Who's Now] 원로 여배우 최은희

입력
2008.08.01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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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의 한 여배우가 있다. 젊은 영화감독과 사랑에 빠져 ‘간통죄 1호’의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긴 당대 최고의 스타. 그러나 결혼생활은 23년 만에 남편의 배신으로 끝나고, 그는 북한으로 납치된다.

북한에서 홀로 보낸 5년의 세월 후 역시 납북된 남편과 재회한 여배우. 열정적인 영화 작업으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며 북한을 대표하는 영화인이 된 그는 영화제 수상차 방문한 유럽에서 남편과 함께 자유세계로 탈출한다.

누군가 이런 스토리로 영화를 만든다면 이 통속성에 칼날 같은 비판이 빗발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의 삶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원로 배우 최은희(82).

2006년 4월 작고한 신상옥 감독을 기려 지난해 만들어진 공주 신상옥청년영화제(5~9일)의 홍보를 위해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에 나선 그를 만났다. 커다란 모자에 선글래스, 짙은 화장과 향수 냄새가, 그가 아직 ‘여배우’임을 표나게 속삭였다.

-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영화제 일 하고 있고, 한 달 전부터는 서예를 시작했어요. 그 전에 60년대에는 동양화 하는 학생한테 배워서 사군자를 했거든요. 사실은 금년 1월부터 서예를 해보려고 했는데, 빙판길에 넘어져서 다치는 바람에 못하다가 이제야 시작했죠.”

- 건강은 괜찮으시고요?

“건강해요. 그런데 나이가 있으니까 병원을 자주 가게 되고, 근래에는 병원 출입이 내 집 드나들 듯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와요.”

- 참 고우세요. 누가 80대로 보겠어요.

“다들 그래요.”(웃음)

- 지금도 따로 관리하고 그러세요?

“관리보다는, 죽기 전까지는 여배우라는 걸 항상 머리에 넣고 있으니까 평소에 조심을 하죠. 어딜 가나 사람들이 자꾸 알아보니까 준비 안된 채로는 동네도 못 돌아다니고. 하여간 행동의 부자유는 평생을 느껴요.” (동석한 며느리가 “여배우라는 건 평생의 굴레”라고 거들었다.)

- 신상옥청년영화제도 그렇고, 예전에 안양영화학교를 만드신 것도 그렇고, 후진 양성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요. 한때 60년대에 신필름이 직원만 250명 됐거든요. 그런 정도로 큰 회사여서 작품도 여러 작품을 했어요. 일년에 26편을 했던 해도 있을 정도니 인재난에 걸렸죠. 감독도 키워야 되고, 배우도 부족하고. 배우 하나가 열 두 작품에 겹치기를 할 때였어요.

그래서 신 감독이 학교를 설립한 거예요. 신 감독 자신이 그런 소신 하에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제 자체도 청년영화제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 같아요. 영화는 피부로 느끼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해야 한다는 게 신 감독이 늘 얘기하던 거였어요.”

세계 2차대전 중이던 1943년, 방공호 훈련 중 만난 배우 문정복의 소개로 극단 아랑의 연구생이 된 최은희는 처음부터 주연을 도맡아 한 운 좋은 배우였다. 그러나 그의 연기 인생이 본격적으로 개화한 것은 “영화에 미친 야생마” 신상옥 감독과 만난 이후. ‘최은희-신상옥’의 짝패는 이제 공고하게 결합한 하나의 어휘여서 따로 떨어뜨려 놓으면 어딘가 허전할 정도다.

- 신 감독님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한창 잘 나가는 여배우와 신인 감독의 만남이었는데.

“영화 전에 연극을 많이 했었는데, 신 감독이 와서 많이 봤더라구요. 그러다 53년 피란지에서 <코리아> 라는 작품을 찍으면서 함께 일을 하고 싶다고 교섭을 해왔어요. 첫인상은, 글쎄요, 신상옥 감독 하면 당시 여배우들이 모두 멋쟁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어요. 잘 생겼다 그러고. 제 눈엔 굉장히 스마트하고 부드러워 보였어요.

무엇보다 연기자를 구속 안 하니까 그게 참 좋았고. 그 당시 감독들은 연기 시킬 적에 시선까지 일일이 잔소리를 한단 말이에요. 연기자라면 감정에 의해 시선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는데 그렇게 구속하니까 너무 싫더라구요. 하지만 신 감독은 모든 걸 연기자한테 맡겼어요. 그런 게 좋아졌던 것 같아요. 물론 프로포즈도 받았지만.”

- 어떻게요?

“피란지 대구에서 <야화> 라는 연극을 하는데 한복 질끈 동여매고 남자들하고 칼 싸움을 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너무 힘이 들어서 무대에서 쓰러져 버렸어요. 난리가 났죠. 그런데 객석에서 구경하고 있던 신 감독이 뛰어올라 와서 나를 들쳐 업고 병원에 갔대요. 그때 그 사람 마음을 알게 됐죠.

신 감독 자서전에 보면 나에 대한 이매지네이션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여배우와 딱 들어맞는다는 얘기가 나와요. 날 보고 <꿈> 을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대요. 이광수의 <꿈> 에 나오는 달례 아가씨요. 여배우 최초로 승마를 했던 작품인데, 난 그렇게 영화를 하면서 모든 걸 배웠어요.

무용하는 거, 발레 기본동작, 승무춤, 가야금, 피아노.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했죠. 가이다마(대역)로 하기 횡底?내가 직접 한다고 우겨서 했어요. 지독한 면이 있죠. 독하다고들 많이 그랬으니까. 완벽하지도 못하면서 완벽주의자라고.”

- 신상옥이라는 남자의 어떤 점에 반하셨어요?

“성실하니까요.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우고, 그게 쉽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내가 담배를 피웠었죠. 연기자는 어쩔 수 없어요. 담배 피우는 연기를 하다 보면 그냥 배우게 되는 거죠.”

- 신 감독님이 개런티를 주신 적이 없다고 들었어요.

“신 감독은 처음부터 집에서 돈 가져가서 자력으로 영화 제작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항상 제작비에 쪼들리는 형편이었어요. 당장 진행비가 없을 정도로 고생하는데 개런티 달라는 말이 안 나오죠.

그게 습관이 돼서 나중에 회사가 커졌을 때도 개런티 줄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내가 그때부터는 생활비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죠. 그래서 생활비만 줬지, 출연료는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다른 영화사의 작품을 몰래 몰래 하면서 출연료 받아 쓰고 그랬죠.”

- 사람들이 보통 상상하는 여배우로서의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생활, 못하셨겠네요?

“그랬어요. 바깥에서는 내가 굉장히 풍족하게 사는 줄 아는데, 물론 일반 사람들보다야 나았겠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풍족한 생활을 하지 못했어요. 신 감독이 작품에 필요한 의상, 장신구, 화장품 이런 건 아낌없이 해주니까 그런 걸로 만족하고 열심히 일을 했죠.”

- 영화적 동지, 감독 신상옥 말고 남편 신상옥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감독 신상옥은 정말 존경할 만해요. 반면 가장으로서는 빵점이에요. 자기 일에 열심히 몰입하다 보니까 가정은 등한한다고. 가정은 어련히 잘 굴러가려니, 그러면서 영화 위주로만 생활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아내로서 남편한테 바라는 게 항상 부족했고, 아이들도 그랬죠. 그래서 중간에서 내가 참 힘이 많이 들었어요.”

- 혼자만 바깥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집안 일을 다 떠맡아야 하는 게 억울하지 않으셨어요?

(웃음) “억울하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많죠. 신필름 통해서 좋은 작품 많이 했으니까. 실은 결혼 50주년 금혼식을 한다고 그러던 차에 신 감독이 돌아가셨어요. 물론 중간에 7년 동안 공백이 있었지만, 그것만 빼면 50년 충분히 해로했다고 볼 수 있죠.

예술계에서 이렇게 해로했다는 게 한편 자랑스러워요. 유혹도 많고 사건도 많고 별일이 다 있었지만, 이렇게 해로했다는 게 흐뭇하기도 하고.

아쉬운 건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건데…. 통뼈라 워낙 건강하신데 불행히도 이북에 붙잡혀 갔을 적에 탈출 기도했다가 다시 붙잡혀서 감옥 생활 할 당시에 병에 걸리셔서…. 그렇게 가신 게,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사그러져서 무너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에요.

그럴 때마다 내가 정신을 차려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할 일이 많은데, 이 양반 못다 하신 일도 많고, 내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되겠다, 해서 기운을 차리고 또 차려서 지금 살고 있어요. (가운데 손가락에 낀 쌍가락지 중 아래쪽 반지를 보여주며) 이게 감독님 끼고 계시던 가락지거든요. 항시라도 내 손에서 빼는 법이 없어요. 어딜 가든지 같이 다니고.

지금도 옆에 같이 계신 기분이에요. 우리집에도 그 양반이 쓰시던 것 그대로 있고, 옷도 그대로 보관하고 있고. 가끔 안아보고 냄새도 맡아 보고 그래요.”

- 다음 생에 태어나면 또 신상옥의 아내가 되고 싶으세요?

“생전에 그런 농담 했어요. 만약 내세가 있다면 이번에는 내가 남자로 태어날 거라고, 바꿔서 태어나 만나자고. 그럼 그 양반은 그냥 웃었죠.”

최은희는 지난해 펴낸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 을 통해 차마 밝히기 어려운 사생활의 구석구석을 털어놓았다. 불임으로 아이 둘을 입양한 사연, 신 감독이 신인 여배우 오수미와의 사이에 낳은 두 자식 때문에 이혼했다가 결국 그들을 자식으로 받아들이게 된 이야기, 6ㆍ25때 인민군에게 끌려갔다 도망쳐 나온 후 국군 헌병대장의 수청을 들었던 얘기까지 공개했다.

- 자서전 <고백> 을 보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파란만장할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보셨어요? 아이, 챙피해.(웃음) 굴곡이 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는 게 인생인데, 나는 특히 그런 게 심했죠. 받은 고통도 컸고, 영광도 컸고. 그런 거 생각하면, 정말 내 인생은 좋은 꿈을 꾼, 아기자기하고 재밌는 꿈을 꾼 기분이에요. 난 인생을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어. 쪽배가 바다의 파도를 타고 가는 게 인생이다.

바다라는 건 순할 땐 얼마나 좋아요. 그러다가도 성이 나면 하늘을 찌를 듯이 파도가 치고, 그걸 지나고 나면 또 다른 파도가 오고. 그게 우리 인생이 아닌가 싶어요. 유난히 풍랑을 겪는 사람도 있고, 잔잔한 파도로 인생을 끝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만, 내 인생은 풍랑이 너무 많았죠. 그러나 아기자기한 인생이었어요.”

- 참 담대하신 것 같아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굉장히 많이 겪었는데, 그걸 아기자기하다고 표현하시니.

“담대하지 않으면 배우 하나요. 잘 견뎌내기도 했고 잘못 산 것도 있고 그래요.”

- 사실 바깥에서 애까지 만들어온 남편을 용서한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아요. 어떤 힘으로 그 모든 걸 다 극복하고 50년을 함께 오셨어요?

“예술적 힘과 애정. 정말 깊이 사랑했으니깐요. 정말 빈틈없이 사랑하는 일생을 보냈어요. 중간에 스캔들도 있고 그랬지만, 스캔들이라는 건 인간 생활에 늘 따라다니는 거예요, 누구나. 그걸 잘 극복할 수 있었다는 건 사랑의 힘이라는 거. 돌아가신 후에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지만 그 양반도 참 끔찍이 사랑했구나, 그런 걸 느껴요.”

그와의 대화는 어떤 얘기를 나눠도 ‘망부가’가 됐다. 화제를 돌려 북한에서의 일들을 물었다. 1978년 홍콩에서 납치돼 1986년 비엔나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망명하기까지, 그의 극적인 인생에서도 가장 극적인 9년.

- 가끔 북한에서 보냈던 시간들 생각나세요?

“그때 같이 작업했던 동료들이 가끔 생각나요. 5년 만에 신 감독 만나서 영화작업 했던 때. 갖은 설움 다 잊어버리고 영화에만 몰두할 수 있었으니까요. 신 감독 일하는 스타일이 스태프들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몰입하게 되면 식사 때도 거르고 하기 때문에, 같이 고생한 젊은 사람들이 가끔 생각나고 보고싶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항상 긴장하고 공포스러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별로 즐거운 일이 없었어요.”

- 굉장히 극진한 예우를 받으셨다면서요. 보내신 시간도 9년으로 길고, 하고 싶은 영화작업도 실컷 하셨고. 그 정도면 어지간히 익숙해지지 않나요?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이해를 못해. ‘그렇게 대우하고 잘해줬다는데 왜 그래’ 그러지만, 내가 여기 자유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 아니에요? 여기 가족 친지가 다 있죠. 근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환경이 바뀌었을 때 받는 쇼크가 어떻겠어요. 저 사람들이 과연 나를 어떻게 써먹으려고 그러나, 더군다나 난 6ㆍ25때도 붙잡혀갔다가 탈출했던 경험이 있단 말이에요.

나를 왜 데려왔나,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러나, 처음엔 그게 공포였고,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환경에서 5년을 살았으니 어땠겠어요. 내일 어떻게 될까, 6ㆍ25때 자기네 배신하고 도망갔다고 날 죽이지 않을까, 항상 그런 공포 속에서 살았는데.

솔직히 내가 여배우기 때문에 날 또 어떤 남자한테 바치려고 그러지 않을까 이런 생각, 일반적으로 이런 상상들을 다 했다고 그래요. 내 동료들도 그렇고. 나라고 왜 그런 걸 못 느꼈겠어요. 두려웠죠. 신 감독 만나기 전까지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5년 간 산 속의 외진 곳에 연금당하다시피 살았다구요.

내가 눅진한 성격이니까 그걸 견뎠지 다른 여배우 누구누구를 만일 이런 환경에 집어넣었다면 어떻게 견뎠을까, 그런 상상을 많이 해봤다니깐요.”

-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왜 선생님을 납치한 건가요? 일설대로 선생님 팬이었기 때문인가요.

“그래요. 내 영화를 다 가지고 있었고, <상록수> 같은 영화는 자기네 영화인들한테 교재로 썼다고 해요. 대사 같은 거. ‘왜 동무들은 최 선생 같이 이렇게 말을 못하냐’고 그러더라구요. 거긴 사투리가 심하니까 내 서울말이 부러웠던가 봐요.

영화에 그런 걸 도입하고 싶고 후진도 양성할 겸 우리 같은 사람들을 데려간 거죠. 우리가 학교도 하고 수많은 영화를 했던 걸 알고 있어요.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남한에서의 일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 가까이서 본 김정일 위원장은 어떻던가요?

“대체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은 양면성이 있는 거 같아요. 아주 부드럽고 친절하고 인간미가 있고 그래요. 그러면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건 막 밀고 나가는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에요. 불도저 같은 성격. 추진력과 결단력이 굉장해요.”

- 참 드센 팔자다, 그런 말들을 많이 하잖아요. 본인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시나요?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돼서 이런 삶을 살고 싶으세요?

“연기자 생활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면 ‘야, 평범이 얼마나 행복한 건가’,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근데 역시 인생은 평범한 것보다는 굴곡이 심한 인생이 더 재밌고 멋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으면 뭘 해요.”

- 앞으로 어떤 계획 있으세요?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가 정식 사단법인으로 인가가 났어요. 신성일씨가 이사장이고, 조직은 벌써 만들어졌어요. 여기서 장학사업도 하고, 신 감독님이 평소 하고 싶어했던 작품도 제작하고, 뮤지컬 공연도 하고 그러려고 해요. 신상옥감독기념관도 충북 괴산에 지으려고 준비하고 있고.”

- 연기를 계속할 계획은 없으시고요?

“내가 안 한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이제 나이 먹었다고 안 써줘서 그렇지.(웃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아요. 좋은 작품 있으면 언제라도 할 거예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사진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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