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만난 신문사 동기 모임에서 ‘지백’ 논쟁이 벌어졌다. 지백은 ‘지속가능한 백수’를 말한다.
지백은 아예 백수는 아니다. 백수처럼 시간여유는 많고 돈은 그 여유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버는 것이 지백이다. 백수이지만 일거리는 꾸준히 들어오는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지백 논쟁이 나온 것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가 잠시 들른 동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재테크에 성공해서 40대 후반이던 5년 전 은퇴생활을 겸해 캐나다로 떠났다. 경제적인 여유는 있었지만 자녀교육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최근에 막내가 미국 명문대에 입학하면서 시간여유까지 얻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골프를 실컷 칠 수 있고 언제든 해외여행을 떠날 여유도 되었다. 한국에도 부동산에 투자한 것이 있어서 이민간 교포들이 한국의 부동산 부자들에게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도 없었다.
전문성 살린 퇴직 후 소일거리
그래서 한국에 오면 남들의 부러움을 살 줄 알았는데 동창들이 한결같이 “일이 없어서 어떡하냐”고 걱정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돈이 아무리 많고 여유시간이 넘쳐 나도 이렇다 할 일거리가 없는 그의 삶을 한국에서는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걱정을 자꾸 듣다 보니 그 스스로도 잘못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고 한다.
7명이 모인 그 자리에서 의견은 엇갈렸다. 두 명은 당연히 할 일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세 명은 그냥 여유를 즐기는 것을 한국인들도 받아들일 때가 왔다고 했다.
이때 할 일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내세운 것이 지백이었다.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지백으로 사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젊어서는 돈 들어 가는 데도 많고 여유를 즐기면서 일을 했다간 직장이나 사회에서 밀려나기 십상이라 은퇴 후에 지백을 즐기는 것이 최고라고 했다.
지백론을 주장한 두 사람은 모두 신문사를 퇴직하고 전문성을 살려서 중국전문사이트와 스포츠전문사이트를 운영한다. 중국전문사이트를 운용하는 동기는 실상 한적을 읽고 문중의 문집을 새로 써주는 일이 주수입원이었는데 원래의 취미였던 한적을 읽는 일이 지백을 유지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지백은 실상 ‘백수’가 아니라 ‘지속가능한’에 방점이 붙어있다. 그만큼 자칫하면 그냥 백수로 떨어질 위기를 안고 산다. 그래서 ‘지속가능’이 중요하지만 원래도 그냥 노는 상태는 전혀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전문성을 살리는 일을 하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반면 그냥 놀아도 좋다는 쪽에서는 의견이 두 가지로 갈렸다. 한 사람은 골프 실컷 치고 여행 다니는 현재를 즐기라고 했고 한 사람은 이제 한국에도 귀족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고 했다. 유럽의 귀족들은 집안에 재산이 있으면서 돈을 버는 일을 천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광물학이나 본초학 같은, 시간을 쏟아야 하지만 돈은 되지 않는 취미를 즐겼고 이것이 나중에 기초학문의 발판이 되었다. 한국에서 양반들은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유배로 향리와 떨어지면 추사나 다산처럼 연구에 몰두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이들이 못하는 의미 깊은 연구와 봉사를 하는 후반생을 열라는 것이 신귀족론이다.
‘행세’보다는 차라리 즐겨라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일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는 때로 ‘행세할 직함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은퇴해도 명함에 쓸 한 줄이 없다면 가련한 삶이라는 것이다. 목숨줄이 붙어있는한 돈과 권력과 명예를 다 갖고 살아야 한다는, 이런 한국적 강박관념이 가장 사악하게 표출되면 공직자로 있으면서 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종부세를 감면하라느니 제 땅 주변을 재개발하라느니 하는 수작까지 서슴없이 한다.
이렇게 사악한 자들이 행세하는 모습을 매일 보고 있자니 돈많은 이들이 지백이나 신귀족은 못되어도 그냥 제 돈으로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살기만 해도 고결하다 하고 싶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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