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박용관 일병을 만난 것은 1987년 7월 땡볕이 절정이던 여름이었습니다. 중대 행정병이었던 저는 신병들 중 박 일병의 자라온 환경이 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박 일병은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녀석이었습니다. 부산 모 대학에 진학해 민주화를 외치는 운동권 학생이 된 뒤 날마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시위를 하다가 강제입대를 하게 된 경우였습니다. 다행히 사격 능력과 체력이 좋았고 어떤 교육이든 잘 수행하는 편이었지만 표정은 늘 어두워 보였습니다.
녀석이 배치된 지 한 달이 되어갈 때 울산 H사 파업과 대통령선거로 시국이 어수선해지면서 비상사태가 선포됐습니다. 우리 중대는 야외 훈련을 떠나 매복을 하고 있었죠. “박 이병, 이제 좀 적응이 됐냐? 너 어머니께 편지는 자주 쓰는 것 같던데 어째 답장이 없냐? 너 집에서 내 놓은 자식이지?”녀석은 한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강 병장님, 사실은 그 편지 제 친구 자취방으로 보냈습니다.” 녀석은 입대할 때 어머니께 인사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혼자 어렵게 대학까지 보내며 기대를 하고 계신 가난한 어머니께 민주화운동 한답시고 수시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면서 마음고생을 너무 시켜드려 면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입대도 숨겼고 3년 동안 죽은 듯 지낼 생각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녀석도 일병으로 진급했습니다. 그 해 4월 중순 전역이 두 달 남은 제게는 마지막이 될 대대종합훈련이 시작됐습니다. 밤낮으로 행군하는 게 제일 힘들었는데, 그날도 아침을 일찍 먹고 천황산으로 행군하는 길이었습니다. 산에는 누렇게 익은 보리처럼 억새들이 봄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사자평이란 곳은 지금은 관광명소지만 그 때만해도 등산객이나 관광객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억새밭은 그야말로 장관이었고, 멀리 산등성이에서 산나물을 뜯는 아주머니 몇 명이 보이는 사람의 전부였습니다.
10분 간 휴식명령이 떨어지자 저는 박 일병을 데리고 산나물 뜯는 아주머니들 쪽으로 다가 갔습니다. 저녁에 부식으로 쓸 산나물을 구할 생각이었거든요. “아주머니, 나물 많이 뜯으셨습니까?” “아이고, 군인 아자씨들 고생하네예. 훈련 중인 갑네예?” “예.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차도 안 다니는 곳인데.” “우리는 마, 며칠 산에서 산다 안 하나. 나물도 한 철 아이가.” 그런데 옆에서 놀란 얼굴을 하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시던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더듬거리며 말씀하셨습니다. “니, 니… 용과이 아이가? 맞나? 니 용과이 맞나?” “어, 어, 어머니….” “아이고 맞구나! 이 문디이 자슥이 용과이가 맞네! 아이고….”
그렇습니다. 산나물 뜯던 아주머니들 중에 밀양이 고향인 박 일병의 어머니가 계셨던 겁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얼싸안고 목 놓아 울더군요. 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몇 달 뒤에야 아들이 입대한 사실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아무 소식이 없어 가슴만 치고 있던 어머니가 그 깊은 산속에서 야영과 행군에 검게 타고 소금기로 얼룩진 도깨비 같은 아들을 만났으니 얼마나 놀라고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중대장님은 다른 중대원들을 먼저 출발 시키고 30분을 더 기다려 주셨습니다.
박 일병의 어머니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중대장님과 제게 “우리 용과이 착한 앱니더. 잘 보살펴 주이소” 하시며 연신 허리를 굽혔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기다리라 하시더니, “시방 드릴게 이것 밖에 없네예”라며 보따리를 하나 건네주셨습니다.
중대장님은 박 일병이 군대 생활 잘 하고 있고 곧 휴가도 갈 것이라고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그렇게 짧은 모자 상봉을 끝내고 다시 행군길로 들어섰는데, 박 일병은 턱 끈을 바싹 조인 철모를 눌러쓴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목젖을 타고 내리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중대장님과 저는 어쩌면 우리 군대사에 없을 기이한 만남에 아무 말 없이 칙칙대는 무전기 소리만 들으며 걸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돌아보니 아, 사자평 저 끝에 보일 듯 말듯 먼발치서 아직도 손을 흔들고 계시는 박 일병 어머니가 보였습니다. 아들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려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오르고 계신 어머니 모습에 저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행군이 끝나고 숙영지에서 저녁을 준비하며 박 일병 어머니께서 주신 보따리를 풀어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거기엔 취나물과 쑥, 표고버섯, 고사리 등이 깨끗하게 다듬어져서 종류별로 신문지에 포장돼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맨 밑에는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석 장과 천원짜리 두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자식과 동료들에게 먹일 나물에 사랑과 정성을 쏟으셨고, 어쩌면 집에 돌아가실 때 쓰실 차비를 전부 털어 보따리 속에 넣으셨던 겁니다.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원망과 열등감에 이를 악물고 참고 참았던…, 이제는 얼굴도 희미해진 7살 적 기억의 제 어머니가 그 순간 제 눈물 속에서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그날 밤 박 일병과 함께 초병을 섰습니다. “야, 박 일병! 괜찮지? 첫 휴가 가면 어머니께 잘해 드려라. 나는 어머니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임마!” 녀석은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말없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별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박 일병은 그 밤에 아들을 그리며 눈물로 잠을 못 이루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저는 이렇게 건강하게 자란 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일찍 하늘로 가신 어머니를 가슴에 품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강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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