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ㆍ27일 한ㆍ러 공동성명에 담긴‘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의 보존과 강화’문구의 파문은 지금도 외교관에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으로 남아 있다. 성명이 나올 때만해도 그 표현이 미국과 외교적 갈등을 불러올 것이라고 짐작한 외교관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뉴욕타임스가‘한국이 러시아 편에 섰다’고 보도하면서 발칵 뒤집혔다. 막 출범한 조지 W 부시 정부는 야심찬 미사일방어(MD) 계획에 장애가 되는 ABM협정의 폐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동맹국인 한국이‘보존과 강화’를 지지했으니 오해를 살만했다.
그런데도 외교부는 어설픈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 문구가 러ㆍ일 공동성명에도 포함돼 있고 빌 클린턴 정부 때도 사용된 것이어서 문제될 게 없다는 논리를 강변했다. 부시 정부의 입장이 180도 달라졌다는 점을 간과한 치명적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실수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 해 7월 부시 정부와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김대중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MD추진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려는 미국의 집요한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대통령도 미국 방문 때 공개 사과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외교관들은 자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을 다른 부서에 돌리며 서로를 손가락질했다.
외교적 전략 부재와 무능, 변명일관은 유전병이라도 되는 걸까. 7년을 건너 터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의장성명 문구 삭제 파문은 우리 외교의 부실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의장성명에 포함됐던‘10ㆍ4선언에 기반한 남북대화’라는 표현이‘금강산 사건 관심 표명’문구와 함께 삭제된 데 대한 비판론이 일자 외교부는 해명과 방어에 사활을 건 듯하다. 한 당국자는 청와대 정부 국회 등의 지인에게 이메일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고 하니 꽤 다급했던 모양이다.
외교부의 설명대로라면 그토록 해명에 부산할 일도 아니다. 그들의 표현대로‘화이널(Final)’의장성명이 나온 후 의장국의 손목을 비틀어 북한의 숨은 의도를 저지했으니 질타가 아니라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당당하지 못할까. 해명에 허둥대고 수시로 말을 바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분명하다. 그 해명이 스스로의 잘못을 가리는 데 골몰해 있는 까닭이다.
애당초 남북 사이에 풀어야 할 ‘금강산 피살 사건’을 국제무대로 끌고 간 것은 잘못된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장성명에 우리 입장을 담아 냈다면 반대할 것이 뻔한 북한을 상대로 외교적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설명이 갑자기 달라진다.
그 표현이 빠진 것을 추궁당하자 회의에서 두루 언급한 것으로 성과를 달성했다면서 의장성명의 가치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돌리고 있다. 더욱이‘북한도 금강산 문구 삭제를 요청했다’고 보도한 일본 언론을 원군 삼아 파문의 책임을 북한에 돌리려는 태도는 자기 기만이다. 애당초 북한이 반대할 줄 몰랐던가.
‘10ㆍ4선언’문구를 기필코 삽입하려 한 북한의 의도를 몰랐던 것이라면 외교관으로서의 무능과 나태를 자인한 꼴에 지나지 않는다. 의장국이 초안을 돌리지 않아 몰랐다는 변명은 외교관의 책무를 망각한 궤변이다. 솔직하게 노무현 정부 때의 외교 업적을 그대로 이어받기가 싫었다고 인정하는 편이 옳다.
ABM협정 문구 파문의 교훈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글자 한자한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 외교의 총체적 부실을 차제에 도려내지 않으면 국익을 흔드는 실수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일러주고 있다. 의장 성명 문구 파문에서 드러나 외교부의 무능을 어물쩍 넘길 일이 아니다.
김승일 국제부장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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