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보수는 늘 초라한 모습이다. 낡은 군복, 주류에서 밀려난 듯한 늙은이들, 세상이 바뀐 것도 모르고 옛 경험이나 가치에 함몰된 사람들로 표현된다. 그들은 말에 능하지도, 조직적이지도 못하다. 소극적이다. 은밀하고 치밀한 전략도 없다. 그러니 논리와 싸움에 무능하고 약한 것도 당연하다.
정치싸움에 갇힌 방송
반면 진보는 늘 당당하다. 자신들이 언제나 ‘선(善)’이고 진리이다. 필요한 것은 가능하다는 확신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싸움에 적극적이며, 끈질기다. 보수에게 변화의 의지가 없고 회귀의 강박만 있다면, 이 땅의 진보에게는 R.W 에머슨의 말처럼 감사하는 마음이나 신중한 태도, 검약과 이타주의는 없다. 10년 동안 누려왔던 배타적 ‘권력’과 보수의 특권인 ‘안녕’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극단적 이기주의만 있을 뿐이다.
둘의 싸움은 필연적이다. 정권 교체란 다름아닌 권력과 안녕의 ‘측근’이 바뀌었다는 뜻이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자와 앉으려는 자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보수의 기회는 진보에게 곧 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는 당연히 진보가 강하다. 그들은 적극적이고, 속내야 어떻든 진리와 사회정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오랜 투쟁과 조직화와 전략의 경험이 있다.
그것을 모르는 보수는 승리를 자신했다. 소극적이지만 다수의 힘을 믿었다. 한 쪽으로 기운 추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되찾은 ‘권력’을 믿었다. 7대 3의 우세로 우리 사회 곳곳에 박아놓은 대못을 쉽게 빼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첫 전투부터 참패했다. ‘쇠고기 졸속 수입협상’이라는 치명적 실수를 진보는 놓치지 않았다. 아군이 적으로 돌아섰는데도 보수는 그것을 무시하고 마구 밀고 가다 계곡에 갇히고 말았다. 상대를 얕보는 오만과 자기 방임으로 1라운드 초반 카운터 펀치를 맞고 다운을 당하자 허둥대기 시작했다. 남은 라운드에서 만회가 가능한데도 초조한 나머지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요즘처럼 방송 탄압, 장악, 음모란 말을 자주 들은 적도 없다. YTN사장에 대통령 측근을 앉히고, KBS 이사를 내쫓고, 을 검찰에 고발해 수사하게 만들고, 정연주 KBS 사장을 내쫓으려 연일 압박을 가하고. 그야말로 첫 패배가 방송에 있었다고 생각한 정부의 전방위 공세라고 방송노조, 진보단체와 언론, 야당이 한 목소리로 저항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방송’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려는 사람들은 모두 ‘적’으로 몰아 붙이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 논리대로라면 지금의 KBS도 ‘정부의 방송장악 음모’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2006년 노무현 정권의 정연주 사장 연임 강행을 놓고 그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당연히 그들은 먼저 그 장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있으며, 나아가 정의로 미화하고 있다. 자기 모순이다.
진보 정부의 방송장악은 괜찮고, 보수 정부의 방송장악은 안 된다는 것인가. 먼저 진보가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부터 보여 줘야 한다. 보수정권이기때문이 아니라, 어떤 권력이나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롭기를 원한다는 것을 스스로 먼저 증명해야 한다.
스스로 ‘과거 잔재’ 떨쳐내야
그런 다음 지금 정부에도 같은 요구를 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게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을 그냥 놔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지금 상황이 방송장악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상황도 방송장악이 아니다. “방송장악을 주장하는 사람이 더 정치적”이란 말도 그래서 나오고 있다.
국민의식의 성숙, 방송 노조와 단체의 힘, 시민단체의 감시를 감안하면 아무리 막강 권력이라도 독재시절처럼 방송을 장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제라도 탄압 장악 음모라는 정치적 구호를 버리고 방송 스스로 먼저 과거 ‘방송장악’의 잔재부터 청산해야 한다. 독립과 공정성을 위한 이 정부와의 싸움은 그 다음에 해도 된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