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장으로 근무하다 보면 전시장을 둘러보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이다. 가끔이기는 하지만 근무자들의 자세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사항 청취와 같이 관람객과의 직접적인 접촉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전시물을 둘러보면서 ‘먼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일단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람객의 입장이 되어 기획자의 의도를 알려고 노력한다. 전시물을 매개로 삼아 박물관의 기획자와 필자 사이에 요모조모로 소통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른바 ‘minds-on’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일반 관람객과 달리 기획자도 겸하는 입장이기에 자연스럽게 과거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기도 한다.
훌쩍 1,500년 전의 고대 마을로 이동하여 열심히 철제 낫으로 곡물 이삭을 거두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매우 고단한 삶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기계식 콤바인으로 손쉽게 탈곡까지 마치는 현대 농촌의 들녘 풍경으로 연이어 생각이 달려가기도 한다.
이러한 시간여행이 즐거우면서도 가끔은 두려운 마음 때문에 진열장 앞에서 물러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 머물러 있는 필자가 과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까닭이다.
이미 어느 젊은 사학자가 비유를 통해 지적했다시피 고대인은 필자와는 전혀 다른 시간관념 속에서 살았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늘어진 줄을 타듯이 위에서 아래로 시간을 인식하는 ‘줄의 시간’ 속에서 살았다. 이런 관점에서는 시간을 시초(始初)에서 면면히 후세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다가올 미래보다는 거쳐 온 시간, 특히 시원(始原)에 많은 관심을 부여한다. 그들이 시조(始祖), 시조묘(始祖廟)를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시원에서 멀어질수록 두려워했기 때문에 완전한 변화보다는 전통의 지속, 혹은 시원과 공존할 수 있는 변화를 원했다. 이에 비해 현대의 필자는 철저히 ‘길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요컨대 앞으로 쭉 뻗은 길을 걷듯이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앞을 보고 길을 걷게 되므로 과거의 시간보다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중요시하게 된다. 과거보다 발전한 현대의 모습, 현재보다는 진보할 미래의 모습을 중요하게 다루게 된다. 이와 같이 고대인과 현대인은 시간관념조차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필자가 전시장에서 시도하는 시간여행이 여전히 ‘길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예를 들어 고대의 철제 낫에서 현대의 기계식 콤바인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지면서 매우 고단한 삶이었을 것으로 유추하는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과연 기술적인 혁명은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또 이를 통해서만 인간이 보다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 고대인들은 ‘줄의 시간’ 속에 살면서 오히려 급속한 기술적 진보를 두려워하였으며, 가지고 있는 것 그대로의 삶을 지켜나가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누렸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필자의 시간여행은 온전히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전시장을 둘러보는 기쁨이 배가될 수도 있다. ‘길의 시간’ 속에서 ‘줄의 시간’으로 옮아가려는 노력 속에서 이미 익숙해진 유물도 새롭게 다가오고, 보지 못했던 역사적 맥락도 새롭게 찾아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전시장을 향할 때마다 전혀 새로운 시간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유병하 국립 춘천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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