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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9> 조용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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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9> 조용필 이야기

입력
2008.07.28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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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 홀에서 한국 가수가 공연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흥분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렇기도 하고 인기가 막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조용필을 보기 위해 정말로 많은 교포들이 찾아왔다. 문제는 이 부분이다. 미리미리 예약을 한 사람들이야 걱정이 없지만 그냥 현장에서 표를 사겠다고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자, 이 양반들을 어찌한단 말인가. 더구나 청소년소녀들을 어찌한단 말인가. “표 없으니까 미안하지만 그냥 가십쇼”라고 할 수도 없고 아주 난처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100명이 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또 관리 책임자를 찾아 갔다. 어쩌구 저쩌구---그러니 부탁 좀 합시다. 보조의자를 복도 사이사이에 놓읍시다. “예? 당신 미쳤소? Are You Crazy?"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녹화 카메라 설치하는거나 조명등 갖다 놓는 것은 협조 할 수 있지만 객석 보조 의자는 “Are You Crazy?”라는 것이다.

그래, 난 미쳤다. 당신 같으면 안 미치겠냐? 밖을 좀 봐라.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할래? 워싱턴DC에서 오고 LA에서도 왔다. (사실 LA에서 일부러 온 사람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는 통 사정을 했다. 실제로 그때 난 약간 미쳐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안 나지만 50개 정도의 보조의자를 갖다 놓을 수 있었다. 녹화 카메라 바로 뒤에서는 사람이 앉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대신 보조의자를 허락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어려움은 나하고 조용필의 누나와 매형이 겪으면 되고 가수는 열심히 노래만 잘 하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말 하지 않았다.

역시 조용필이었다.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되어 훌륭한 공연을 마쳤다. 역사적인 카네기 홀 공연을 국내가수 최초로 해내었다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객석을 가득 채운 교포들도 가슴 뿌듯한 감동을 안고 돌아 갔다. 그런데 문제는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내가 아닌가. 애초에 모든 경비는 매표한 돈으로 커버가 되지만 추가로 들어간 경비는 어쩔 것인가? 또한 녹음 상태도 안 좋고, 녹화된 비디오 품질도 안 좋고, 지구레코드 임정수 회장은 마음에 안 든다고 얼굴 찡그리고 있고…. 나는 뉴욕-서울을 왔다갔다 몇 번 하느라고 돈만 쓰고.

결국 나는 쪽박만 찼다. 그러나 그렇게 큰일을 기획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 조용필이 오늘날 대 가수가 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것이 기분 좋은 일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1983년인가. 나는 한국일보의 월간 편집국장(출판국장)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은 전두환 정권시절이었는데 사회의 저명인사들, 즉 정치계의 유력 인사들, 재계의 총수들, 군 장성들, 신문 방송의 국장급이상, 종교계 지도자들, 대학교 원로 교수들, 문화예술계 원로들, 고참 판검사들 등등을 뽑아서 경기도 판교에 있는 정신문화연구원에 입교를 시켜 한국의 역사와 정신, 전통문화 등에 관한 교육을 받고 원생들 간에 친목도 도모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도 그 속에 뽑혀 들어갔다.

우리 동기 원생들 속에는 불교계의 큰 스님인 월운 스님이 계셨다. 이분은 불교 역경원 원장을 하고 계셨고, 광릉내에 있는 큰 사찰인 봉선사의 방장 스님이신데, 하루는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셨다.

“정 부장, 뭐 하나 물어 봅시다.” “스님, 잠깐만요. 부장이 아니고, 국장입니다.” “아, 그래요? 부장이 더 높은거 아닌가? 난 높여 부른건데. 중앙정보부 좀 봐. 부장 아래에 국장들이 있던데.” 이런 분이다.

그 스님이 하시는 말씀. “조용필이라는 젊은이가 날 찾아 와서 절에서 결혼을 하고 싶은데 주례를 서 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서 줬는데, 뭐 하는 젊은이인지 아슈?” 나는 기가 찼다. “아니 뭐하는 친군지도 모르고 주례를 서 줘요?” “젊은 녀석이 와서 간절히 부탁 하는데 뭐하는 친군지는 알아서 뭐해. 잘 살면 되지.” “가수예요. 가수. 그것도 아주 유명한 가수.” “어쩐지 자가용이 수 십대 오더군. 내가 TV를 안 보니까 모르지 뭘.” 잘 살면 되지 라고 말씀 하신 큰 스님의 바램은 무산 되고, 조용필은 얼마 후에 이혼을 했다. 그때 그 여인은 박지숙씨였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국회의원 박모씨의 딸이다.

조용필은 과연 어떤 가수일까. 국민가수라는 수식어는 본인도 싫다니까 없던 걸로 하고, 어떤 이는 최고의 아티스트, 가왕 등등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또는 거저 찾아 든 것이 아니다. 내가 대학 가요제의 심사위원을 할 때, 마침 조용필과 함께 심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노래를 아주 썩 잘 부르는 K대학 남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 학생에게 대상을 주자고 제안을 했다. 그랬더니 조용필은 생각이 달랐다.

“선생님, 저 학생이 분명히 노「?잘 부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끼가 안 보이네요, 끼가요. 선생님 어떻게 보세요, 그 점을.” 정말 그랬다. 프로가 되려면 ‘끼’가 생명이다. 조용필은 그걸 중요시 여긴 것이다.

흔히들 그를 천부의 소질, 타고난 가창력이라고 말 하는데, 그건 약간 빗나간 것 같다. 지독하게 노력해서 만들어진 가수이고, 가창력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끼’를 타고난 것이라고 말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대학 가요제에서 노래만 잘 하는 학생에게 대상을 주기 싫어했던 것이다.

사실 그의 노래를 주의 깊게 들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끼로 옷을 입혔다는 걸 알 수 있다. 창밖의 여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노래를 들으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를 때하고 크게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수많은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약간씩 창법을 달리하고 있다. 자칫하면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다.

조용필, 그는 ‘끼를 타고난 노력하는 가수’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뇌가 어찌 없을 것인가. 결혼의 실패, 다시 결혼하고 부인과 사별하고. 군중 속의 고독을 그도 느낄 것이다. 그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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