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 성명 삭제를 둘러싼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외교통상부가 왜 의장 성명이 발표된 뒤 10ㆍ4남북정상선언 문구를 빼기 위해 노력했는지, 북한은 과연 어떤 대응에 나섰는지, 청와대와 외교부 간 책임 소재는 어디 있는지 등을 놓고 의혹과 논란이 증폭되는 분위기다.
24일 밤 의장 성명이 발표된 직후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싱가포르 정부가 남북의 입장을 균형되게 반영하고자 병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성명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 해석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하루 뒤 입장이 달라졌다. 외교부 이용준 차관보가 싱가포르 외교부 차관을 만나 10ㆍ4선언 부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고 금강산 문구와 함께 빠졌다. 외교부 측은 “10ㆍ4선언은 ARF 회의에서 제대로 논의도 안 됐는데 왜 성명에 담았느냐는 취지로 싱가포르에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하루 전과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정부가 10ㆍ4선언을 부정한다는 시그널을 북한에 보내 남북 관계 악화가 우려된다는 비판으로 파문이 확산되자 27일 정부는 또 말을 바꿨다. 이 차관보는 일부 기자와 정치권에 보낸 이메일에서 “10ㆍ4선언 관련 조항 전체를 삭제해 달라고 한 게 아니라 사실과 전혀 다른 잘못된 표현이 있어 정정을 싱가포르에 요청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런 급격한 입장 변화 때문에 외교부에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담이 될 10ㆍ4선언 이행 부분이 ARF 의장 성명에 담기자 청와대의 강력한 문제 제기가 있었고 이에 놀란 유명환 외교부 장관이 이 차관보에게 부랴부랴 싱가포르와의 협의를 지시한 것 아니냐는 얘기다. 청와대 관계자도 “금강산 사건은 단기간에 끝날 사안이지만 10ㆍ4선언이 성명에 담기면 한국의 대북정책 기조를 구속할 수 있어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물론 27일 청와대 기류는 “직접적 지시는 없었다”며 한 발 빼는 분위기다. 그러나 청와대의 오락가락 지침 때문에 외교부 당국자들이 이에 맞는 해명을 내놓느라 허겁지겁 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특히 “ARF 의장 성명 자체가 큰 구속력이 없다”는 정부 측 설명대로라면 10ㆍ4선언을 북에 보내는 유화 메시지로 남겨 두지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느냐는 문제 제기가 쏟아진다.
북한에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도 비난을 사고 있다. 일본 교도(共同)통신은 26일 북한이 금강산 사건 관련 문구 삭제를 요청해 싱가포르가 10ㆍ4선언 문구도 함께 빼게 됐다고 전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들도 이런 보도가 진실에 가깝다며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북한의 움직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 문구를 함께 삭제했다며 북한에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분위기다. 여권 관계자는 “외교부 측은 ‘이번 성명 수정 파문이 한반도 정세를 잘 모르는 싱가포르 외교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담당자들이 참여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북한의 외교력을 은근 슬쩍 비난하기 전에 한국의 외교 역량부터 가다듬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 ARF란
ASEAN Regional Forum(아세안 지역안보 포럼)의 약칭으로 아시아_태평양 지역의 정부간 안전보장 협의체. 매년 각국 외무장관들이 주요 지역의 현안 및 국제정세를 논의하며 구속력 없는 의장 성명으로 결과를 정리한다. 현재 싱가포르 등 아세안 10개국을 포함,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 총 27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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