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허무할 수도 있다. 작정하고 자세히 보자면 억겁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작품 감상은 10분 안에 끝날 가능성이 높다. 시간과 의식에 대한 철학으로 점철된 거대한 작품이지만, 시각예술적 측면에서 보자면 한낱 조야한 도서전집 세트 몇 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개념미술의 거장 온 카와라의 국내 첫 개인전이 서울 사간동 두아트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언론 인터뷰에 응한 적도, 공개된 얼굴 사진 한 장도 없는 이 은둔형 기행작가의 나이는 전시가 개막된 23일 기준으로 2만7,605일.(환산하면 1932년 12월 24일생. 올해 76세.) 이것이 일본인 작가로 불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공개한 유일한 공식 이력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시리즈는 자신의 하루하루치의 삶을 작품으로 치환한 ‘I WENT’(나는 갔다), ‘I MET’(나는 만났다), ‘I GOT UP’(나는 일어났다) 3종 세트.
나무 테이블 위에 정연하게 놓인 회색 표지의 두꺼운 책들을 펼치면 하루 동안 온 카와라가 다닌 길, 만난 사람, 일어난 시각이 표시된 ‘작품’들이 1년 단위로 묶여 있다.
‘I WENT’는 1968년 5월 10일부터 19년 9월 17일까지 12년간 매일매일 이동한 경로를 지도 위에 붉은 선으로 표시한 작품. ‘I MET’에는 68년 5월 10일부터 79년 9월 17일까지 그가 만나 대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들을 나눈 사람들의 이름이, ‘I GOT UP’에는 그가 매일 아침 의식을 획득한 순간의 시각을 고무도장으로 찍고 ‘I AM STILL ALIVE’(나는 여전히 살아있다)라는 메시지를 적어 지인들에게 보낸 우편엽서가 담겨있다.
작업도구들을 도난당하기 전까지 12년간 세계 이곳 저곳을 떠돌며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던 시절 만든 이 자서전적 작품들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지독한 투쟁이자 인간 실존과 의식에 대한 깊은 명상이기도 하다.
69년부터 이전 100만년(BC 99만8,031년)과 93년부터 이후 100만년(AD 100만1,980년)의 연도를 한 해씩 타이핑해 두 권의 성경책처럼 만든 ‘ONE MILLION YEARS’(100만년)은 그 책 안의 연도를 고요히 낭송하는 남녀 성우의 음성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낭송시간만 꼬박 30일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전시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온 카와라는 1966년 1월 4일 시작해 지금까지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날짜그림’(Date Painting) 시리즈로 유명해졌다.
‘날짜그림’은 검은색 배경에 흰 글자로 연월일을 그려놓은 것이 전부. 당일 자정부터 다음날 자정까지 24시간 안에 제작하는 것이 원칙으로 데드라인을 넘길 경우 작품은 파기된다.
어떤 디테일로도 하루의 모든 사건을 기록할 수 없지만, 이 그림은 그날의 전 역사를 기호화할 수 있는 코드라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동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개념미술의 진정한 애호가라고 뻐겨도 좋다. 다음달 24일까지. (02)2287-3500
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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