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리 건너 간접적으로 아는 한 의사는 히말라야 예찬론자다. 지금도 틈날 때마다 히말라야를 찾는 그는 5년 전 그곳에서 색다른 일을 겪었다. 네팔 정부에 입산료를 지불하고 마칼루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죽창 든 산사람들이 나타나 통행료라는 명목으로 돈을 또 내라고 한 것이다. 그래 봐야 몇 만원 정도였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통행료를 낸 그에게 산사람들은 영수증을 주었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毛澤東) 등 공산주의 혁명가의 얼굴이 조악하게 인쇄된 영수증이었다. 캉첸중가산에서 만난 산사람들은 훨씬 부드러웠다. 가이드를 통해 돈을 준비하라고 미리 일러주었고 협박도 하지 않았다. 이 의사 말고도 네팔을 찾은 산악인과 트레커들은 이런 식으로 통행료를 내야 했다. 이 통행료는 산사람들의 정치자금 혹은 활동비로 쓰였다. 그들은 마오주의(모택동주의)를 표방하며 네팔 왕정과 싸우던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만난 한국의 산악인들은 ‘저 사람들이 과연 정권을 잡을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네팔 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익히 경험했던 터라 ‘어쩌면 정권을 잡을 수도 있겠다’며 집권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 가능성은 결국 현실이 됐다. 네팔은 올해 4월 선거를 통해 239년 역사의 왕정을 종식시키고 마오주의 네팔공산당을 제1당으로 탄생시켰다.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가 독주하는 21세기에, 게릴라 활동을 하던 마오주의 정당이 한 나라의 다수당이 됐다는 사실, 의아하지 않은가. 연기 뿜는 굴뚝 산업을 넘어 첨단 IT나 금융 등 보이지 않는 산업의 시대에 사는 한국인에게 마오주의는 뜻밖의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도시 노동자는 힘이 약해 결국 가난한 농촌을 혁명의 기지로 삼아야 한다는 마오주의의 눈으로 보자면 네팔은 그 조건에 딱 맞는 나라다. 내륙에 위치한데다 관광, 농업말고는 별다른 산업이 없으며 빈부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마오주의자가 활동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선거가 실시된 지 이제 세달 남짓, 아직은 나라의 틀을 정비하는 시기다. 그래서인지 네팔 마오주의자가 내놓은 구체적이고 정교한 정책을 아직 접하지 못했다. 다만 이 나라가 관광산업에 치중할 수 밖에 없는데다 지도부의 면면을 볼 때 폐쇄적이거나 교조적인 이념국가가 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이 컸다면 중국, 인도, 미국 등이 어떤 식으로든 간섭했을 것이다.
신생 국가 혹은 새 질서 구축 과정의 국가가 흔히 그렇듯 네팔 역시 한동안 진통과 좌절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며칠 전 실시된 제헌의원 투표에서 제2당인 네팔국민회의당 소속 람 바란 야다브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을 보면 진통은 벌써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소수정당 출신의 대통령과 다수당인 네팔공산당이 향후 새 정부 구성 과정에서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더라도 그 역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히말라야처럼 높지는 않아도 한국 역시 산이 많다. 엄홍길 같은 세계적인 산악인은 네팔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배출할 수 없었다. 작가 박범신이나 가수 이문세처럼 네팔에 매료된 예술가가 많다. 물질주의에 젖은 한국인들이 그곳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고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 일하는 네팔 노동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의미에서라도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네팔을 응원하고 싶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난을 떨치고 네팔 사람들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다.
박광희 국제부 차장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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