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판산(六盤山)을 떠나 장정코스를 역으로 달려 동쪽으로 후이닝(會寧)으로 향했다. 후이닝은 최근 티베트문제로 시위가 일어난 바 있는 간쑤(甘肅)성의 수도인 난조우(蘭州)의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간쑤성은 외국인들이 쓰촨(四川)성으로부터 진입하는 것이 제한돼 있어 걱정을 했는데 문제는 없었다. 간쑤성이긴 하지만 동쪽에 위치해 장족들이 거의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히려 회족들이 많았다.
마을에는 홍기 모양에 장정도시라고 쓴 장식을 가로등에 쭉 설치해 놓아 장정도시의 긍지가 강함을 보여줬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기념탑과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사진에서 본 높은 중국 전통가옥 양식의 탑이 나타났다. 1ㆍ2ㆍ4방면군 회합 기념탑이다.
마침 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이 탑 앞의 넓은 광장에서 사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장정 역사현장 학습일 것이다. 학생들 뒤에는 소총을 세운 듯한 꼭대기에 별을 매달고 가운데 홍군의 얼굴을 새긴 뒤 전체를 붉은 천으로 감싼 힘 있는 조각이 있었다.
앞에는 1ㆍ2ㆍ3 방면군의 회합을 상징하여 3군의 붉은 군기 셋을 세워놓고 뒤에 ‘중국 노동자 농민 제1ㆍ2ㆍ4 군 회합 기념탑’이라고 쓴 10층 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탑에 올라 내려다보자 1936년 10월19일 이 광장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3군 병사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들의 해후로 사실상 홍군의 장정은 끝을 맺었다.
물론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중앙군(제1방면군)은 한해 앞서 1935년 10월18일 우치(吳起)에 도착함으로써 368일 만에 장정의 막을 내렸다. 우리가 흔히 장정이 끝났다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2ㆍ4방면군은 장정을 계속, 1년 뒤에야 이 지역에 접근했다.
소식을 들은 마오는 영접 선발대를 보냈다. 중앙군의 선발대는 10월2일 인구 2,000명의 후이닝으로 진격해 도시를 장악했다. 저우언라이(周銀來)가 도착해 2ㆍ4군 영접준비를 했다.
10월8일 장궈타오(張國燾)가 4방면군을 거느리고 도시로 들어와 성대한 환영행사가 열렸다. 이미 이 지역을 지나쳤던 허롱(河龍)과 2방면군은 연락을 받고 되돌아왔다.
3군은 축제로 밤을 새웠다. 이로써 홍군 전체의 장정이 끝난 것이다. 얼마 뒤 장궈타오, 저우언라이, 허롱은 함께 말을 타고 마오가 기다리고 있는 바오안(保安 후에 즈단ㆍ志丹으로 바뀌었다)으로 입성했다.
후이닝에서 다시 류판산을 거쳐 장정의 최종 목적지인 싼시성으로 향하면서 제2ㆍ4방면군을 생각해 봤다. 장정이 승자인 마오와 제1방면군을 중심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 4방면군의 비극
마오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장궈타오의 4방면군은 쓰촨 동북부에 근거지를 잡고 있다가 다쉐산(大雪山)을 넘어온 마오의 군과 해후했다. 그러나 장궈타오는 마오와 견해가 달랐다. 쑹판(松潘)초원을 건너 간쑤성으로 들어가려는 마오와 헤어져 쓰촨 서북쪽의 아바로 갔다. 그러나 겨울을 거기에서 날 수는 없었다.
장궈타오는 마오 군의 장정이 거의 끝나가던 35년 10월10일 “청두(成都)를 공격하겠다”며 남하를 시작, 루딩(瀘定)교로 향했다. 또 다른 부대는 샤오진(小金) 에서 다쉐산을 넘어 바오싱(寶興)으로 진군했다. 마오 군 진군방향의 반대로 움직인 것이다. 국민당군의 핵심을 격파하며 청두에 가까워졌다.
장은 자신감에 넘쳤고 병사들도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장제스(張介石)는 20만 대군을 청두 방어에 투입했다. 평지에 전선이 펼쳐지면서 국민당군의 폭격이 힘을 발휘했다. 일주일 사이에 장궈타오는 병사 1만을 잃고 출발했던 서북쪽의 장족 지역인 간즈로 밀려나야 했다. 군대는 4만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모스크바의 밀사였다. 모스크바는 린뱌오(林彪)의 사촌을 내몽고를 통해 싼시(陝西)성으로 보냈다. 그는 마오를 만나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파시즘의 대두를 설명하면서 위기의 시대에 당이 단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장궈타오와도 오랜 친분이 있던 그는 무선으로 장궈타오도 설득했다. 그의 중재로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장궈타오는 중앙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에 따라 그가 후이닝으로 진군해 온 것이다.
그러나 4군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36년 9월 소련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마오와 중국공산당이 요청한 다수의 무기를 외몽고를 통해 지원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3군이 연합군을 구성해 물품인도지역까지 돌파하기로 했다. 장궈타오 군 4만, 마오 군 2만, 허롱 군 2만 등 8만군의 총지휘관으로 마오가 추대됐다.
이들은 닝샤(寧夏)의 황하를 건너 외몽고로 북상하기로 했다. 10월24일 여성부대를 포함한 4군의 선발대가 황하를 건넜다. 그??이후 국민당군의 폭격 등으로 나머지 군은 도강에 실패하고 작전을 포기했다.
4군은 둘로 나뉘어 절반인 2만여 명이 강을 건너 이미 전진하고 있었다(비판적 학자들은 마오가 당내부 정치 때문에 의도적으로 4군을 위기로 몰고 갔으며 이미 강을 건넌 4군 선발대에게도 작전취소 사실을 알리지 않아 이들을 전멸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황하를 건너 서진한 4군 선발대는 보급이 중단되고 고립돼 추위와 기아, 그리고 지역소수민족(마족)의 공격으로 거의 전멸했다. 특히 여성부대는 대부분 적군에게 잡혀 윤간을 당하고 사창가에 팔려갔다. 결국 당내 권력뿐 아니라 자신의 병력도 잃게 된 장궈타오는 국민당군에 귀순하고 말았다.
■ 2방면군의 행적
난창(南昌)봉기의 영웅 허롱이 이끈 2방면군의 행군은 상대적으로 순탄한 편이었다. 후난(湖南)성 서북쪽에 근거지를 갖고있던 허롱 부대는 후난과 구이조우의 경계를 오가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군이 건너간 우강 근처 마을에서 한참 전에 주더(朱德)가 이곳을 지나 서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앙지도부의 행방을 알게 된 이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국민당군과 간헐적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구이조우(貴州)를 횡단한 2방면군은 윈난(雲南)의 군벌에게 중국의 고사를 들어 홍군과 싸우다가는 장제스에게 먹힐 것이니 우리와 싸우지 말라는 밀서를 보낸 뒤 윈난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 윈난으로 들어가자 지역군벌 롱윈(龍雲)이 홍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허롱은 쿤밍(昆明) 공격을 명령했다.
놀란 롱윈은 군대를 철수해 쿤밍 방어에 집중시켰고 홍군의 윈난 통과를 묵인했다. 2방면군은 윈난 동쪽에서 진사(金沙)강을 건너간 중앙군과 달리 윈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쿤밍을 거쳐 서북쪽으로 진군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성이 있는 리장(麗江)으로 들어갔다. 리장에서는 한족과 지역의 소수민족인 나시(納西)족이 홍군을 환영했다.
이어 샹그릴라로 북상한 2방면군은 부근의 유명한 라마 불교사원인 쑹짠린쓰(松贊林寺)사원과 장족의 소수민족종교를 존중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36년 4월말 이들 2만여 군대는 별 탈없이 진사강을 건넜다.
이후 2방면군은 둘로 나뉘어 한 부대는 매리설산을 거쳐 티베트의 국경을 따라 북상해 쓰촨의 서북쪽 끝으로 진군했고, 또 다른 부대는 자신들이 진정한 샹그릴라라고 주장하는 다오청(稻城)을 거쳐 북상한 뒤 36년 6월 말 간즈에서 합류했다.
허롱은 이곳에 주둔하던 장궈타오와 정보도 교환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장궈타오가 자신과 행동을 같이하자고 하자 “엿이나 먹으라”고 일축한 뒤 마오와 제1방면군과 합류하기 위해 그들이 있던 싼시 쪽으로 진군해 갔다. ·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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