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0월 중일평화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 당시 중국 부총리는 일본기자클럽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센카쿠(尖閣) 제도를 중국에서는 댜오위다오(釣魚島)라고 부른다. 이름부터 다르듯 영유권 문제에 대해 양국 간에 차이가 있다. 국교정상화 때 양국은 이 문제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평화조약 교섭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인의 지혜로는 이 방법뿐이다. 이런 문제는 미뤄도 된다.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훨씬 지혜로워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좋은 해결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30년이 다 가도록 중국과 일본의 ‘다음 세대’는 덩샤오핑이 기대했던 지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실효지배가 계속되는 한편으로 중국은 물론이고 대만의 영유권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 대만 어선이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받혀 침몰한 사건으로 “최종 수단으로 군함 파견도 배제할 수 없다”는 류자오쉬안(劉兆玄) 대만 행정원장의 발언까지 나왔다.
눈길 끄는 日 '센카쿠 방식'
센카쿠 제도의 영유권 분쟁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오키나와(沖繩) 현에 편입됐고, 이듬해 민간인이 무상으로 장기 임차, 가다랑어 어업 기지 및 ‘가쓰오부시’ 공장으로 활용됐다. 1932년 4개 주요 섬이 아예 그 집안에 불하됐고, 1940년 가다랑어 잡이가 중단되고 공장이 폐쇄된 후로도 그 소유로 남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일본의 관할권을 명시한 뒤에도 특별한 분쟁 조짐은 없었다. 그러나 68년 해양조사에서 주변 대륙붕에 이라크와 비교될 정도인 거대 유전의 존재 가능성이 밝혀진 이후 분위기가 일변했다. 71년 대만과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이래 사실 상의 분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의 대응 방식이다. 72년 오키나와 반환으로 이 지역의 주권을 회복한 후에도 일본은 극히 소극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했다. 해상보안청 순시선은 중국이나 대만 측의 상륙 시도를 막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ㆍ대만의 영유권 주장에 자극을 받은 일본 우익단체 회원들의 접근을 막았다. 경찰 경비대를 배치하거나 시설물을 설치하지도 않았다.
우익단체가 무단으로 설치했다가 소유권을 포기한 등대를 2005년 국유화한 것, 79년에 해상보안청이 간이헬기장을 만들었다가 중국의 항의가 거세자 철거한 것이 전부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철저한 경계ㆍ경비를 촉구하는 국회결의, 중국ㆍ대만 측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한 정부 성명 등이 고작이다.
중국 측의 활발한 문제 제기나 주변 해역에서의 무력시위에 비해 너무 저자세가 아니냐는 우익단체나 보수언론의 질타가 거듭돼도 요지부동이다. 철저하게 ‘조용한 외교’에 매달리고 있다. 적극적으로 ‘시끄러운 외교’에 나서봐야 분명한 현실적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또 중국과 대만이 관심 환기 수준을 넘어 극단적 실력행사에 나설 이유도 없고, 이미 제기한 영유권 주장을 거둬들일 까닭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현상 유지도 하나의 지혜다.
그 대신 영유권 문제와 직결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분쟁의 핵심인 해저자원 개발 등 경제적 문제는 ‘실용적으로’ 풀어가자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중일 어업협정도 그렇지만 최근 일본이 주장하는 ‘EEZ 중간선’을 기준으로 삼아도 중국 측에 속한 해역의 에너지자원 공동 개발에 합의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독도와 실용외교 함께 살려야
대신 이런 실리는 고도의 에너지 효율화 기술 등 상대방이 군침을 흘리는 ‘실력’의 뒷받침 없이는 챙기기 어렵다. 소모적 대응에 국민적 역량을 허비하는 대신 상대의 관심을 끌 ‘실력’ 개발에 돌리자는 게 기본방침인 셈이다. 장기적 논쟁에 대비해 중국ㆍ대만 측이 들고나올 주장을 반박할 자료 수집과 연구에 열중하는 것은 물론이다.
독도 문제로 대일 실용외교가 위태롭다. 일본의 ‘센카쿠 방식’에서 독도와 실용외교를 함께 살릴 길을 엿볼 수 있다. 지피지기는 여전한 지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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