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이제 지역주의가 유전자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 1992년 대선 당시 한 재야 토론회에서 진보진영이 취해야 하는 전략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고 나오자 오랜 친구가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호남 출신의 이 친구는 나의 주장에 논리적으로는 공감하지만 정서적으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며 충격적인 유전자론을 들고 나왔다.
최근 한나라당 소속 김귀환 서울시의회 의장이 의장 선거 등과 관련해 30명의 동료의원들에게 뇌물을 살포하고 국회의원들에게도 후원금을 전한 사건을 접하면서 떠오른 것이 지금도 생생한 바로 이 유전자론이다. 그렇다. 한나라당의 피 속에 부패 유전자가 내장되어 있지 않는 이상, 차떼기 등 비리문제로 그 고생을 하고도 또 다시 이 같은 비리를 저지를 수는 없다.
부패한 한나라당의 서울시의회
아니 부패 유전자가 아니라면 금품 살포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의회를 거의 싹쓸이한 한나라당이 시의회 구성을 강행해 구속된 김 의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비리 연루자들을 부의장과 주요 상임위 위원장에 선출할 수는 없다. 게다가 시의회 구성 강행에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에게 “억울하면 한나라당에 들어오라”고 조롱했다니 천인공노할 노릇이다.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나라당을 용서하게 된다. 유전자야 본인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타고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 뽑은 유권자들이 아닌가? 특히 그간의 비리 전력을 다 알고서도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며 뽑아 놓고도 돈 좀 돌렸다고 분노하는 ‘속 좁은(?)’ 유권자들의 이중적 행태가 문제가 아닐까?
주목할 것은 최근 국회의장에 당선된 김형오 의원이 의장이 되기 위해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돈을 살포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최소한 중앙정치에 관한 한 한나라당도 상대적으로 깨끗해졌다. 사실 지방자치가 부패로 물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지방자치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아니라 ‘풀뿌리 부패주의’에 가깝다는 우려가 든다. 이는 ‘큰 것’을 중시하는 우리의 특성과 관련해 국회의원과 같은 큰 권력에 좋은 지원자들이 몰리고 주민들의 관심도 쏠리는 반면 지방자치의 경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서울은 ‘중앙’이고 지방은 ‘지방’이라는, 그리고 서울은 ‘국가’고 지방은 ‘시민사회’라는 잘못된 통념이다. 서울시와 서울시의회는 서울에 있지만 중앙이 아니라 지방(정확히 이야기해 지방정부)이다. 또 서울도 시민은 시민사회이지 국가가 아니고 지방도 지방정부는 국가지 시민사회가 아니다.
강준만 교수는 최근 한국일보 지면(6월 11일자와 7월 1일자)에서 인구 집중이 대규모 시위를 용이하게 해주고 시민사회단체들도 집중되어 있어 서울이 민주화의 선봉이 된 반면 지방은 그렇지 못해 민주주의에서도 뒤떨어졌다는 주장을 했다.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그러나 보지 못한 면도 있다. 그것은 이번 서울 시의회사건이 보여 주듯이 서울의 경우도 중정부와 달리 지방정부인 시의회는 주민의 관심도 적고 시민단체들의 감시도 약해 풀뿌리 부패주의를 키워 왔다는 점이다.
시민단체도 지자제 감시는 취약
사실 지방의 시민단체들이 취약하지만 그래도 가까이 있는 지방정부를 주로 감시한다면 서울의 시민단체들은 힘이 세지만 주로 중앙정부를 감시하느라고 바빠서 서울의 지방자치제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시의회 돈살포 사건에 대한 서울시민의 촛불시위는 없다.
감시 없이 부패하지 않는 권력은 없다. 관심과 감시가 없는데 인구밀도가 높고 네트워크가 많으면 무엇 하는가? 그것이 풀뿌리 부패주의의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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