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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흔든 천재시인의 스캔들/ KBS 한국사傳, 최경창과 기생 홍랑 사랑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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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흔든 천재시인의 스캔들/ KBS 한국사傳, 최경창과 기생 홍랑 사랑 조명

입력
2008.07.21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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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가지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소서. 간밤 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조선 중기 기생 홍랑이 천재 문인 고죽 최경창에게 보낸 편지 <묏버들가> 다.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은 1570년대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이다. KBS1TV <한국사傳> (19일 오후 8시10분)이 500년 전 뜨거웠던 이 두 남녀의 순애보를 카메라에 담았다.

최경창은 조선 중기 '삼당 시인(三唐詩人)'으로 손꼽힐 만큼 문재가 뛰어났다. 스무 살이 되기 전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렸고, 그의 시조는 중국의 <열조시집> 과 <지북우담> 에 실렸다. <국조시산> 은 "최경창의 절구는 편편이 모두 깨끗하고 맑아 당대의 여러 시인들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함경도 관비 홍랑은 평소 최경창의 시조를 즐겨 읊으며 최경창을 흠모해왔다. 마침 함경도로 첫 부임한 최경창과 홍랑은 사랑에 빠지지만 최경창이 이듬해 부임지를 떠나면서 생이별한다.

서울에 도착한 최경창은 시름시름 앓고,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이주 금지령을 어기고 7일 밤낮을 걸어 서울로 향한다. 최경창은 홍랑의 간호로 완쾌한다.

조선사회는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금지된 사랑을 나눈 최경창을 나무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1572년 5월2일 <선조실록> 엔 "최경창은 관비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버젓이 함께 살고 있으니 이는 너무 거리낌 없는 행동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라는 유생들의 상소가 기록돼 있다.

최경창이 먼저 세상을 뜬 후 홍랑은 최경창의 묘를 지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이 불바다가 되자, 홍랑은 최경창의 시조들을 등에 지고 피난을 떠났다. 홍랑이 죽은 후 최경창의 후손들은 그녀의 절개를 기려 최경창의 묘 아래에 묻어줬다. 그들의 묘는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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